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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황광지 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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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요셉 타케(Emile joseph Taquet/ 엄택기 1873~1952)
에밀 타케는 1873년 프랑스 노드주州에서 태어났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24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다음 해인 1898년 1월 한국 땅을 밟은 후 죽을 때까지 한국을 떠난 적이 없다. 그에게 한국은 제2의 조국이었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 때이다. 에밀 타케 신부는 25세에 조선에 입국하여 4개월 만에 부산본당 세 번째 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관할구역은 경남 전체였다. 진주지역 교우들이 여러 차례 뮈텔 주교에게 신부를 보내 달라고 탄원서를 내었고, 타케 신부가 신설 본당을 자원한 덕분에 1899년 6월 진주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신자들이 마련한 집 옆에 또 한 채의 집을 매입하여, 먼저 집은 성당으로 두 번째 집은 사제관으로 개조했다.


진주본당은 1년 만에 철수되고    
조선말이 서툰 타케 신부가 부임했는데, 비라실(장재리) 교우 몇몇이 포졸에게 잡혀 감옥에 갇혔다는 보고를 받았다. 현지 사정에 어두웠던 타케 신부는 대구의 로베르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고, 로베르 신부는 진주관찰사에게 항의서한을 보낸 뒤 법적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며칠 뒤 타케 신부는 무사히 교우들을 풀어낼 수 있었다.


그러한 과정을 지켜본 진주 교우들은 타케 신부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타케 신부는 자신을 도와야 할 복사가 험한 말썽을 일으켜, 외인들의 신뢰를 잃게 된 일을 겪고 실의에 빠졌다. 거기다 진주본당은 대부분 공소 교우들이고, 시내 교우가 별로 없는데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진주에서 1년을 보낸 타케 신부는 본당을 옮기기로 하고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주성당은 술집과 접대부와 아전만 사는 거리에 있다. 그런데다 건물이 낡아 위험하다. 수리하려니까 2백 원이란 엄청난 돈이 든다.”라고 썼다.


마산포본당에서 경남지역 사목     
본당 이전을 결심한 타케 신부는 후보지 물색에 나서, 결국 마산으로 정했다. 진주를 결정적으로 떠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거처를 일단 비라실공소로 옮겼고, 이곳에서 8일간 지내다 진주를 떠났다. 타케 신부의 진주본당은 1년 만에 철수되었고, 1900년 6월 마산으로 떠났지만 판공 때면 진주를 방문했다.


타케 신부는 마산(당시는 마산포)에서 조선인 밀집지역에 세 칸짜리 본체에 두 칸짜리 헛간이 붙은 집을 600냥에 매입했다. 지금의 상남동과 오동동 일대였다. 이 초가집 성당은 성지여고 터 훨씬 아래 시내 쪽 가까이에 있었다. 당시 마산포본당이 소유한 땅은 현 완월동성당과 장군천 사이에 있었던 대부분의 논밭이었다. 타케 신부와 무세 신부가 그 논밭을 차례로 매입했다. 그는 1901년 10월에 프랑스에 있는 부친의 선종 소식을 듣게 되어 큰 슬픔을 안았지만, 교우들에게 부친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며 견뎠다. 타케 신부는 마산포에 있으면서도 진주, 함안, 삼가, 거제, 통영, 고성, 욕지도, 창녕 등 관할지역의 공소를 돌면서 성사를 집전하고 미사를 올렸다. 


에밀 타케 신부는 제주도에서 트라우마를 갖게 된 무세 신부와 맞바꾸어 1902년 4월 제주 서귀포 한논본당(현 서귀포본당)으로 떠났다. 경남지역에서 비록 3년 정도의 사목이었으나 그가 곳곳에 남긴 노력과 흔적은 마산교구 신앙의 터전이 되었다. 어디서든 선교사의 열정으로 주님의 일을 행하는 사제였다. 


한국 식물분류학계에 ‘타케’ 이름을 남겨      
제주에서 타케 신부는 식물채집에 나섰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식물학자 포리 신부가 제주를 찾아 함께 한라산을 누비며 식물채집을 했고, 이를 통해 제주의 자연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홀로 한라산 일대를 헤매면서 얻은 그의 채집 표본은 여러 경로를 거쳐 유럽 각국에 전달됐다. 타케 신부가 식물채집에 몰두했던 것도 경제적인 이유가 컸던 것이라고 했다. 성당 건립과 선교 활동에는 돈이 많이 필요했다. 당시 식물 표본은 꽤 돈이 됐다. 그는 1908년 한라산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하여 유럽 학계에 보고하였다. 일본에 있는 포리 신부에게 왕벚나무를 보내고 답례로 1911년 온주밀감 묘목 14그루를 받아 심게 된 것이 제주 온주밀감의 첫 시작이었다. 서귀포시 ‘면형의 집’ 앞에는 그중 살아남은 한 그루가 아직도 열매를 맺고 있다. 그가 한국 식물분류학계에 남긴 흔적은 뚜렷하다. 7040여 종의 식물을 채집해 유럽에 보낸 표본 중 250여 종이 신종으로 분류됐다. 그중 학명에 ‘타케’가 들어간 식물만 20종에 달한다. 지난해에는 에밀 타케 신부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에밀 타케의 표본전>을 서귀포 면형의 집에서 열기도 했다. 


사람을 사랑하고 왕벚나무를 좋아한 타케 신부      
에밀 타케 신부는 1902년부터 제주에서, 1915년부터 목포 신정본당에서도 사목했다. 1922년 대구가톨릭대 전신인 성유스티노신학교 교수로 부임해 교장을 거쳐 심장마비로 눈을 감기까지 대구에서 30년을 보냈으며, 대구대교구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왕벚나무를 좋아한 그는 부임한 곳마다 왕벚나무를 심었다. 대구대교구청 인근 곳곳에 그 왕벚나무가 있고, 마산교구 성지여고의 교정에도 왕벚나무가 있다.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타케 신부의 기록이 전해지는데, 특히 돈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저는 돈이 없이 죽어도 괜찮지만 하느님의 대리자로 빚을 지거나 파산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다”라며 주교를 압박하고,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영세를 받은 어린이들에게 작은 두루마기를 사줄 것이며, 작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야겠다, 교리 공부에 열의가 없는 아이들도 좀 더 격려해야겠다는 소소한 내용도 등장한다. 그는 조선에서 55년 세월을 지내는 동안 한 번도 고향에 간 적 없이 조선의 복음화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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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천주교마산교구40년사> <삼천포본당50년사> <완월동성당120년사>
한국순교복자수도회 면형의집 자료, 천주교대구대교구 자료

 

‘가톨릭마산(교구보)’ 1월 14일 자부터 매월 둘째 주에 ‘교구에 이바지한 인물’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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