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하 마리아선생의 4 주기가 다가온다. 그분의 생애를 생각하면 겸허한 자세가 되어 옷깃을 여미게 된다. 2020년 11월 23일 주님 곁으로 떠나면서 선생의 시신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비엔나대학교 해부학연구소에 기부되었다.
마리아 하이젠베르거(1930. 2. 8.-2020. 11. 23.)
오스트리아 취버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마리아는 비엔나여성신학원을 졸업한 후 교리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와 당시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수환 신부와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1959년 12월부터 한국에 체류했다. 1960년부터 효성여자대학 영어강사로 일할때, 오가며 눈에 띈 구두닦이와 넝마주의 소년들 20명을 모아 근로소년단을 조직하여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1962년 11월에는 대구 SOS어린이마을을 설립했다. SOS 어린이마을은 엄마를 중심으로 돌봄을 받아야할 여러 아이들이 한가정을 이루어 사는 집이 여러 채 마을을 이루고 사는 보육시설이며 국제적으로 창설되었다. 그는 한국 에첫SOS어린이 마을을 설립하기 위해 우리나라 쌀 한말을 오스트리아에 가지고 가서 유럽지역 후원자들에게 “이 쌀 한알로 한국의 어린생명을 구할수있다.”라는<쌀한 톨 캠페인>으로 기금을 조성했다. 시설을 설립하고 초대원장으로 6년간 일했다.
하마리아선생
매우 자상한 오스트리아 선교사는 ‘하이젠베르거’란 낯선성 을우리성‘하’로바꿔‘하마리아’로 쉽게 부르도록 상대를 배려하며 활동했다. 1966년 마산교구가 설정되고 초대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의 요청이 있어 하마리 아 선생은 대구대교구를 떠나 더 보살필 사람이 많은 마산교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1968년 5월 김수환 주교가 갑작스럽게 서울대교구장으로 떠난 뒤였다.
아무튼 1968년 8월 국립마산병원에서 교리교사로 활 동하며 하 마리아 선생의 사회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는 장 병화 요셉 교구장의 고뇌를 알게 되고, 1971년 오스트리아 그라츠교구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으며 자매 결연체결에 크게 기여했다. 국립마산병원에서 8년간 수많 은 결핵환자를 돌보는 중에 1975년 2월 진영성모병원 뒤뜰 에 가난한 결핵환자들을 위한 별관을 지었다. 오스트리아를 향해 마산교구와 결핵환자들에 대한 지원을 끊임없이 요청하며 교구의 살림살이를 도왔다.
어린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연민
하 마리아 선생은 마산수출지역과 한일합섬에서 쏟아 져 나오는 어린 여성들을 목격했다. 타지에서 모여든 그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 교육과 돌봄이 절실히 필요한 그들을 위한 시설이 있어야 했다. 그라츠교구에 도움을 요청하여 오스트리아부인회 후원금으로 부지 300평을 마련하였다. 마산시와 마산교구와 논의하고 허허벌판 양덕동에 건축을 추진하여, 1976년 3월 가톨릭여성회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초대 관장으로 일하면서, 대부분 농촌에서 멀리 떠나온 소녀들이라 마음 붙일 데라도 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임했다.자기 집처럼 쉬어갈 수있는 공간이 되고, 그 다음에는 한가지씩 배울 수 있는 곳이 되기를 원했다.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어린 여성들을 보살피는 순수함이었 다. 하 마리아 선생은 결핵구제나 화란연립주택 같은 사회 사업과 겸했던 가톨릭여성회관 관장 직무를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떠났다가, 1987년 4대 관장으로 추대되어 다시 일하기도 했다.
우리 편이 되어 온몸을 던져
1978년 10월 하 마리아 선생은 가톨릭문화원, 양덕동성당, 가톨릭여성회관 건립 등에 들어가는 자금을 장만하려고 교구의 자매세명을 동반하여 그라츠교구로 갔다.함께 한 달동안 모금운동을 했던 윤세실리아에 따르면,선생은 마산교구를 위해서 온몸을 던졌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모금이 잘 될수 있는묘안을 세사람에게 알려주며 최선을 다하도록 속삭였다. 후원금을 모으려는 선생의 집념에 감화되어 한복을 차려입고 춤을 추고 민요를 부르기도 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당시 삼십대였던 그 셋은 자신의 조국보다 마산교구를 위해 불사르는 선생의 사랑에 마음가 짐이 크게 변화되었다.
반송성당을 건축 때에도 하 마리아 선생의 노력이 빛났다. 부지는 ‘오스트리아성지순례단’을 조직하여 헌금으로 마련했고, 건축에는 ‘오스트리아유년단’ 모금이 보태졌다. 하 마리아 선생의 이모를 비롯한 친지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여 성전에 필요한 성물을 들여놓는 정성을 쏟았기에 1981년 건축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유쾌하고 겸손한 삶
한국말뿐 아니라 사투리도 재치있게 구사한 하 마리 아 선생은 얼굴에 늘 웃음이 가득했고, 주위의 사람들도 유쾌하게 만들었다. 스스로를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 여기며 가장 소외된 사람들 옆에 있기를 원한 하마리아선생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곳에서 짐이 될까봐 1992년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오스트리아에 돌아가게 되었다.
선생의 발자취를 되새기며 1999년에는 마산교구장이 초대하여, 그리운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2006년에는 마산교구설정 40주년과 가톨릭여성회관설립 30주년을 기해, 마음이 담겼던 곳들을 다시 만났다. 팔순이었던 2010년에는 지인들의 초대를 받아 마산을 방문하고 명례성지도 순례했다.
선생은 양로원에서 조촐한 삶을 이어갔다. 2020년 2월 8 일 선생의 구순 생일을 앞두고, 그라츠교구자매위원장 최문성 신부를 포함한 8명 축하사절단이 오스트리아를 방문 했다. 마산사투리를 주고받으며 한바탕 인연을 나누는 귀하디귀한 시간이 되었다. 그 직후에 코로나19가 세상을 갈라놓아버렸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