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교구장과의 특별한 인연
김태수 라자로는 1968년 김수환 초대교구장이 서울대 교구로 이임하며 떠날 때 동행하게 되었다. 당시 주교좌 중앙본당 회장으로 있던 터라 교구장의 명을 받았다. 의복과 책들은 화물편으로 탁송한 후 마산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삼랑진역에서 서울행 삼등열차를 갈아타고, 서울로 향했다. 무려 10시간이 넘는 탑승으로 서울역에 내려 택시로 명동성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김수환 대주교는 잘 가라는 손짓을 보내고 기도에 들어갔다. 김태수는 선걸음에 다시 마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제2대 장병화 교구장과는 깊은 연대를 가졌다. 1970년 부터 마산교구 평협회장을 맡았던 그는 1971년 오스트리아 그라츠교구와 자매결연을 하기 위해 교구장과 함께 떠났다. 당시는 유럽으로 가는 직항로도 없었고, 여비를 환전하는 일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사리 그라츠교구청에 도착하여 베버 주교를 만났다. 그때 장병화 주교는 그라츠교구청과 주교좌성당의 훌륭한 면모를 보고, 마산교구의 열악한 살림살이를 생각하며 여러번 눈물을 훔쳤다. 교구청도 없이 성지여고 뒤뜰에 한 칸을 빌려 주교관으로 쓰던 형편이었다. 그라츠교구와 자매 결연을 하고 그들의 지원으로 마산교구청을 지을 수 있었던 감사함은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우리 교구장의 눈물어린 노력과 그라츠교구의 결연을 직접 피부를 느낀 김태수는 그라츠교구에서 마산교구로 내방하는 분들에게 지극 정성으로 환대했다. 평협회장의 책임감에다 사업도 잘 되고 있는 편이라 교구장을 지원하며 물심양면으로 힘을 기울였다.
할아버지의 신심을 새기며
김태수는 1926년 거제도 옥포리 국산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라틴어로 하는 미사에 참여하고 사제를 존경하며 자랐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어촌마을에서 그림 같은 옥포만을 바라보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할아버지 말씀을 새겨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충청도 당진 솔뫼마을에서 태어나고 살던 할아버지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식솔들을 거느리고 거제 땅에 오기까지 고난의 길을 들었다.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동부면 구천리 산 중턱에서 움막을 지어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구워 팔며 연명했다. 할아버지가 와현공소와 국산성당을 알게 된 후 화전 생활을 접고 국산마을에 정착했다. 항상 하느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가야 한다는 할아버지 당부에 평생 하느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충청도 가난뱅이” 로 불렸지만, 김 바오로 신부 아래서 라틴어를 배우고,일곱살부터 새벽 다섯시미사에서 친구 윤치운(윤행도 가를로 신부의 선친)과 둘이서 복사를 섰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마저 다쳐 가난한 살림이라 초등4년에 중퇴하고, 문산약국 점원 4,5년 후 17살에 일본 노무자로 가서 돈을 모아 돌아와 국산마을에 초가집과 논밭도 몇 마지기 사들여 “충청도 가난뱅이”를 면했다.다시 일본으로 가서 일할 때 작은 성당에서 라틴어 덕분에 프랑스 사제 아래 복사도 가능했다.1년 뒤 귀국하여 논밭을 더 늘였다.
마산에 정착하다
김태수 라자로는 혼배성사를 치르고 옥포를 떠나 거제 성당에 다니면서 해방과 6.25를 거치고, 마산으로 이주하여 양품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는 완월동성당에 다니면서 구 마산성당 건축에 많은 힘을 보탰다.벽돌이 귀했던 시절이라 수소문 끝에 진해 해군병창에서 패망한 일본군이 버리고 간 벽돌을 손수레로 새벽부터 하루에 두 차례씩 실어 날랐다. 본당회장과 손수레를 끌면 교우들이 밀고 땀과 먼지가 범벅이 되었던 그시절이 일생에서 제일 신바람났던 때였다고 했다. 김태수는 여기서 1961년부터 1967년까지 회장을 맡아 일했다.
구 마산성당은 1966년 마산교구 설정으로 주교좌 중앙성 당이 되었다가, 1979년 양덕동성당이 주교좌로 되면서 남 성동성당으로 변경되었다.
그는 상남동본당 설립도 추진했다. 드디어 1966년 마산 교구가 탄생하고, 그해 12월 상남동성당도 설립되어 김태수는 초대회장을 맡아 성당 건축에 돌입했다.열악한 환경 속에서 건축비를 마련하여 1968년 5월 봉헌식을 올릴 때까지 열정을 바쳤다. 회장 임기를 끝내며 마산교구 평협 회장을 맡은 후에도 상남동성당에서 4대, 5대, 8대 회장직을 받아들여야 했다.
“착하고 진실되게 살자”란 신념으로 3녀 2남을 키우면서 살아오는 동안 안해본 일이 없다할 만큼 다방면에서 사업을 했다.순조로운 것도 있었고,실패로 끝난 일도 많았다.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깜깜한 밤중을 지날 때는 영원히 해가 뜰 것 같지 않은 시기도 있었다고 했다.“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 라”라는 시의 구절을 외며 구상 시인 존경했다.
로마교황청 십자대훈장을 받다
김태수 라자로는 1970년 2대 마산교구 평협회장을 시작으로 3,4대까지 이으며 1977년 8월에서야 물러났다. 1977년 1월에는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로마교황청 십자대훈장을 받았다. 그는 과연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자문하며 십자대훈장 앞에서 마음을 다 비워내고 겸허함 하나로 남은삶을 살고자 했다.
교구 평협회장, 본당 사목회장을 수행하며 지칠 만했지만, 또 다시 교구의 가톨릭경제인회를 창립하여 1983부터 10년 동안 회장으로 봉사했다. 사회생활에서도 한결같았다. 마산 로터리클럽에 입회하여 꾸준히 사회의 소외된 곳에 손길을 보내는 일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80년 창원상공회의소 초대회장을 지냈고, 1988년 국제로타리 한 지구의 총재를 지내는 역할까지 수행했다.
말년에는 월남동성당으로 옮겨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에게 흐트러짐없는 두터운 신심을 안겨 주었고, 2013년 7월 15일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