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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전사001.jpg

 

교구 40주년 기념 특집으로 ‘마산주보’에 게재되었던 마산교구 전사(前史)를 수정하여 ‘가톨릭마산(교구보)’ 2023년 1월 1일 자부터 재수록 합니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3
피난 교우들은 낙동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경북지방 교우들은 왜관 근처에서 교우촌을 형성했고 이것이 낙산본당 출발이 된다고 했다. 경상도 첫 본당은 왜관 인근에 있던 신나무골본당이다.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경상도 전역을 맡아 활동했다.


그가 본당을 왜관 근처인 신나무골로 정한 것은 그 지역에 교우촌이 많았기 때문이다. 낙산본당은 이 신나무골 본당이 옮겨간 것이다. 당시 낙산에는 낙동강 주변 마을은 물론 멀리 부산까지 왕래하는 선박의 선착장이 있었다고 한다.


거창과 합천지역도 낙동강 주변의 교우촌과 연관이 있다. 거창의 가북면 가조면에는 1890년대부터 공소가 있었고 합천의 대병면, 쌍백면, 삼가면에도 1900년대를 전후해 공소가 있었다. 낙동강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 교우들의 흔적인 것이다. 결국 이 공소들은 거창과 합천본당의 한 뿌리를 형성한다.


교우촌은 언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을까? 신유박해 이전으로 보고 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에 사신을 보내 조상에게 제사 지내지 말 것을 명한다. 물론 이 조치는 한순간 내려진 것은 아니다. 80년 가까이 논쟁하며 중국의 선교사들이 반대했지만 교황의 칙서로 명령된 것이다.


북경 주교의 명령은 조선교회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많은 교우들이 친척은 물론 가족으로부터 따돌림당했고 사사로운 박해를 받기도 했다. 더러는 향촌 마을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고향을 떠나 낯선 산간 지방으로 숨어드는 교우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이 교우촌 형성의 출발이다.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함께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주문모 신부는 1794년 회장제도를 도입한다. 그렇게 해서 조선교회는 회장(공소 회장)을 중심으로 교회 유지와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큰 교우촌도 있었고 작은 교우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여 살았다. 조선교회는 처음부터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았던 것이다. 조상 제사 금지는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열렬한 신자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러다 신유박해를 당한다. 가족을 잃은 교우들이 합세하면서 교우촌은 더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초창기 교우촌은 배티, 살티, 한티 등 높은 산골의 명칭을 갖고 있다.


신유박해는 정치색 짙은 박해다. 정조가 죽자 그의 개혁 정치에 동조하던 세력도 몰락하게 되는데 이들을 몰락시키는 수단으로 신유박해가 이용되었던 것이다. 당시 개혁 세력 가운데는 영남 사람들이 많았다. 흔히 남인계로 알려진 분들인데 교인들이 더러 있었다.


정조 앞의 임금은 영조다. 그는 숙종의 아들로 왕자 때부터 수난이 많았다. 한편 숙종은 죽으면서 경종을 다음 왕으로 선언한다. 경종은 장희빈 아들로 영조와 배다른 형제였다. 그런데 재위 4년에 죽는다. 임금으로 있을 때 몸이 약했던 것이다. 한편 경종이 살아 있을 때부터 영조를 왕으로 앉히려는 세력이 있었다. 사색당파의 노론이다.


경종이 죽자 당시 집권 세력(소론)은 영조와 노론이 합심해 경종을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이후 소론 강경파를 대변하던 이인좌는 역모의 난을 일으킨다. 이인좌의 난이다. 그런데 반란에 영남의 남인계열이 합세했다. 당연히 영조는 대노했고 영남지방에 차별정책을 시도했다.


경남의 낙동강 주변 교우촌은 이 무렵 자리를 잡는다. 특히 남강과 낙동강이 합쳐지는 함안 대산지역엔 피난 교우들이 많이 모였다. 그들이 괄시와 냉대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관의 횡포에 반발하던 민중들의 무관심도 커다란 이유 중 하나였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4
병오박해는 1846년 일어났다. 김대건 신부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박해다. 그의 신분이 드러나자 놀란 조정에서는 신자 색출의 고삐를 죈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 군함 세척이 제물포항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한다. 조선에서 죽은 프랑스인 세 사람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죽은 프랑스인은 기해박해(1839년) 때 순교한 세 분 성직자였다. 엥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다. 이 사건은 가뜩이나 안 좋던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강공强攻으로 나왔고 김대건 신부의 처형을 서둘렀던 것이다. 군함 사건은 6월 하순에 있었고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한강 백사장에서 순교했다.


병오박해는 프랑스 군함 사건과 맞물려 더 이상 진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자들에 대한 감시와 고발은 끊이지 않았고 사사로운 박해는 여전했다. 이렇게 되자 한동안 잠잠하던 피난 교우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 교우는 6,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대부분 서울, 경기지역 교우들이었다. 병오박해를 지켜보면서 이들 중 상당수는 남쪽 지방과 한성 위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변화였다. 이러한 이동은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날 때까지 20년간 지속되었다.


병오박해(1846년)에서 병인박해(1866년)까지 20년은 철종 임금 재위 기간과 비슷하다.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급작스레 왕이 된 그는 무능했다. 임금으로 있던 14년(1849~1863)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결과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횡포로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으로 신자들의 이동은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뜻있는 사람들은 신자들을 받아들였고 교우들은 그들과 합류해 살기도 했다. 마산교구의 교우촌은 이러한 철종 시대에 거의 자리를 잡는다. 대표적인 교우촌 지역은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함양지역, 낙동강 주변 지역, 통영 거제지역, 진주시 일대, 곤양 서포지역 이렇게 다섯이다.


함양지역에 교우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27년 정해박해 이후다. 호남지역 교우들이 넘어왔던 것이다. 전남 곡성에서 시작된 정해박해는 전북으로 옮겨갔고 신자들은 산간벽지로 숨어들면서 진안, 장수, 장계 등에 교우촌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부는 백운산과 덕유산을 넘어 함양, 거창지역까지 갔던 것이다.


기록에 나타나는 함양지역 첫 공소는 리우빌(Liouville, 류달영) 신부가 작성한 1883년 교세 통계표에 나오는 안의 대운암공소와 터골공소다. 리우빌 신부는 1881년부터 전라도 담당 신부로 있었다. 따라서 공소 신자 가운데는 피난 교우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대운암과 터골은 함양군 백전면에 있었다. 이곳엔 전라도와 경상도를 경계 짓는 백운산이 있다. 해발 1279m 꽤 높은 산이다. 피난 교우들은 백운산 주변에 모여 살았고 그들의 권면으로 신자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현재도 이곳엔 함양본당 소속 백운공소와 운산공소가 있다.


한편 1900년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 어은동본당이 설립되자 함양지역은 이곳 소속이 된다. 초대 김양홍 신부는 함양지역에 관심이 많았다. 능경이, 섭자리, 마평공소에 대한 기록은 김 신부 재위 시 등장한다. 아마 그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리우빌 신부의 교세 통계표엔 함양공소가 아니고 안의공소로 나온다. 즉 안의 대운암이다. 왜 그랬을까? 원래 안의는 단독 군郡이었다. 그런데 영조를 반대했던 이인좌의 난亂에 안의 출신 정희량이 가담하자 안의는 군에서 면으로 강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얼마 후 풀리지만 일제 때인 1914년 다시 함양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따라서 선교사 시대의 백운산 일대는 안의 군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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