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21.12.02 13:23

하늘나라

조회 수 116
Extra Form
저자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신부님, 천국이 정말 있을까요?”
예전에 본당 청년 한 명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황급히 임종 전 병자성사를 집전한 다음 착찹한 마음으로 중환자실을 나서는데 처음 보는 어느 형제님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와 던진 질문이다. 그분 동생이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는데 아마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단다. 자기는 신자는 아니지만 천국이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며 울먹였다. 그래서 대답했다.


“예…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그 많은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살아서 못 살았으면 죽어서라도 잘 살아야 하지 않는가! 부잣집 대문 앞의 거지 라자로처럼 죽어서라도 위로를 받아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루카 16,25 참조). 그러니 제발 천국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좀 걸린다. 있어야 할 천국이 꼭 죽어서나 가는 곳이어야 할까? 교통사고와 산업 재해로 죽어간 그들이 이 세상에서 좀 더 잘 살 수는 없었을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천국을 위한 시험장 혹은 수련소 같은 곳인가?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하고 불공정해도 꾹 참고 견디면 다음 생에는 보상을 받는다는 뜻인가?


서양의 왕과 귀족들이 그리스도교를 좋아했던 것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민 평등으로 귀결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보아 가난한 백성들은 좋아할 수 있어도 세상의 권력자들은 결코 좋아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를 국가적으로 용인했던 이유가 바로 천국을 향한 내세지향적 사고방식 때문은 아닐까? 가난한 백성들이 현세의 억압과 차별에서 눈을 돌려 내세의 안식과 복락만을 꿈꾸게 만들 수 있다면 세상의 통치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일이 아닌가!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겪게 되는 고통 모두를 ‘십자가’라는 말로 싸잡아 표현하면서 그것이 죽은 뒤 부활하여 영원한 복락을 누리기 위한 필수과정이라고 말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렇듯 내세의 천국이란 것이 간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만으론 뭔가 불합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목에서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시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천국 즉 ‘하늘나라’ 혹은 ‘하느님 나라’란 과연 어떤 것일까?


예수님께 있어서 ‘하늘나라’는 곧 ‘하느님 나라’다.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내세지향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내세에서만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늘나라 곧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안에서 내세 혹은 현세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 ‘이미’ 와 있으면서 동시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점점 자라고 커지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는 마치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과 같고 밀가루가 누룩에 의해서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다(마태 13,31-33 참조). 따라서 하늘나라는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내 삶으로 이루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대한 중요한 개념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하늘나라란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요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 ‘좋게 살아가는 것’이란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늘나라는 ‘장소’ 혹은 ‘공간’이 아니라 ‘상태’ 혹은 ‘됨됨이’다. 물론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등장하는 하늘나라 혹은 하느님 나라는 대부분 장소처럼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라’라는 단어가 갖는 공간적 이미지에서 파생된 결과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종합해보면 하늘나라 곧 하느님 나라는 ‘장소’이기보다는 세상에서 그리고 내 삶에서 사랑과 일치, 정의와 공정, 생명과 평화 등등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태’요 ‘됨됨이’에 해당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천국을 내세의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것도 천국을 장소나 공간적인 것으로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보라! 지옥에나 있으면 어울릴 것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러니 이런 세상 어디에서 천국을 찾을까? 당연히 이 세상이 아닌 저 제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늘나라를 장소로서 이해하는 데서 오는 어색함은 이뿐이 아니다. 의인들이 하늘나라를 꿈꾸는 것이야 마땅하지만 악인들도 당연한 듯 하늘나라를 꿈꾼다.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지옥을 꿈꿔야 마땅하지 않은가! 마음이 지옥인데 몸만 천국에 있다고 천국일 수 있을까? 삶이 악한데 장소만 천국이라고 그게 천국이 될까?


쇠 젓가락을 포도나무에 박아놓은들 거기서 열매가 맺힐 리 없다. 포도나무에 가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그것이 생김새만이 아니라 성질로도 그 포도나무를 닮아 있어야만 거기서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을 닮아가고 우리 삶 안에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내가 가꾸고 키우는 작은 하늘나라의 모습이요, 이 모습으로 결국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거대한 하늘나라와 온전히 결합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요한 15,1-17 참조)!

 

“신부님,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거지요?”


본당 청년 하나가 한밤중에 전화로 묻는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며 ‘아는 형’들이 제안하는 ‘옳지 않은 일’들을 다 뿌리치고 가난하지만 바르게 살아가는 청년인데 요즘 형편이 너무 힘들다보니 자꾸 마음이 흔들린단다. 그래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확인하는 거다. 그 모습이 너무도 대견스럽고 고마워서 힘을 주어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럼, 그럼! 네가 사는 게 바로 하느님 나라야!”

 

새의 날개가 꺾였다 하여 하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그리는 그 모습 안에 하늘은 살아있다. 그렇게 하늘나라는 그것을 그리고 추구하는 이들의 삶 안에 존재한다. 순교자들이 그랬다. 순교자들은 죽어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하늘나라를 살아간 사람들인 거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출처 : 월간 생활성서

 

211205 5면 백그라운드(홈피용).jpg


  1. 교회가 위기입니까?

    Date2022.01.27 Category렛잇고 문화 렛잇비 신앙 Views94 file
    Read More
  2.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란 무엇인가?

    Date2022.01.20 Category현대 영성 Views1219 file
    Read More
  3. 권력과 존엄

    Date2021.12.27 Category문화읽기 Views103 file
    Read More
  4. 새해를 맞으며

    Date2021.12.27 Category한 말씀 Views61 file
    Read More
  5. 나를 받아 주신 예수님의 그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Date2021.12.23 Category현대 영성 Views109 file
    Read More
  6. 예수, 개천에서 나서, 개천을 살아가신, 용

    Date2021.12.15 Category렛잇고 문화 렛잇비 신앙 Views104 file
    Read More
  7. 내가 끝장나는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다

    Date2021.12.09 Category현대 영성 Views152 file
    Read More
  8. 하늘나라

    Date2021.12.02 Category문화읽기 Views116 file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 34 Next
/ 34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