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22.01.28 16:42

매달리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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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220206 4면 백그라운드 이미지(홈피용).jpg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이다.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신다.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에게 굳이 세 번을 물으신 것을 보면 살짝 ‘뒤끝’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이 분명함에도 집요하게 물으신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 또한 세 번을 답한다. 굳이 세 번을 물으시니 역시나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으로 슬퍼하지만 그래도 세 번 모두 꿋꿋하게 대답한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
위의 이야기(요한 21,15-19 참조)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그런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애절한 사랑 고백이 감동적으로 잘 묘사된 요한 복음서 말미의 대목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 하나 숨겨져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세 번의 질문과 베드로가 한 세 번의 대답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말 원문에서는 의미가 서로 다른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말에는 우리말 ‘사랑’에 해당되는 단어가 여러 가지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가페’ ‘필리아’ ‘에로스’다. 우리말로는 모두 ‘사랑’이라 번역되는 이 단어들은 사실 저마다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이타적 사랑, 필리아는 인격적 사랑, 에로스는 감각적 사랑을 의미한다. 신앙의 관점에서 이해해본다면 필리아와 에로스는 인간적이고 본성적인 차원의 사랑이고 아가페는 신적인 차원의 사랑으로서 인간의 능력이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주어질 수 있는 사랑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베드로가 나눈 사랑의 대화에는 이 세 가지 단어 중에서 아가페와 필리아라는 두 단어가 사용된다. 복음서 원문을 보면, 예수님은 처음 두 번을 아가페 사랑으로 물으시고 마지막에는 필리아 사랑으로 물으신다. 그리고 베드로는 시종일관 세 번 모두 필리아 사랑으로 대답한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단어 사용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왜 예수님은 처음에는 아가페 사랑으로 물으시다가 마지막에는 필리아 사랑으로 질문을 바꾸셨을까? 왜 베드로는 시종일관 아가페가 아닌 필리아 사랑으로 대답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가페와 필리아라는 단어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위 대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너에게 보여준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그 사랑,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단 하나도 잃지 않으려고 목숨까지 바치는 그 아가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 이 물음에 베드로는 대답한다. “아니오, 주님!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아시잖습니까? 제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주님이 붙잡아주시지 않으면 저는 또다시 주님을 배신할 사람입니다. 주님 없이 저는 제게 맡겨주신 양들을 버리고 도망갈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 없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그 아가페 사랑으로 저를 붙잡아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필리아 사랑, 주님께 의탁하는 그 작은 몸짓밖에는 없습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에 예수님은 확인하듯 한 번을 더 물으신 다음 마지막에는 이렇게 물어보신다. “그래,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렇다면 너의 그 필리아 사랑, 그 작은 몸짓만이라도 나에게 다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를 붙잡아줄 터이니 내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너의 그 작은 의지만이라도 나에게 다오! 그럴 수 있느냐?” 예수님의 이 마지막 물음에 베드로는 죄송스러워하면서도 분명하게 시종일관 같은 대답을 드린다. “예, 주님! 주님은 저의 나약함을 모두 아시니 주님의 그 한없는 사랑으로 저와 함께해 주시고 저를 붙잡아주시고 일으켜주십시오.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저의 이 보잘것없는 사랑이라도 주님께 드리며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아가페 사랑이 아닌 필리아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의 이 모습에 예수님은 안도하시며 당신의 양들을 베드로에게 맡겨주신다.


사실 예전에 베드로가 아가페 사랑을 예수님께 고백한 적이 있다.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한다. 아가페 사랑은커녕 필리아 사랑에도 못 미치는 그 초라함이라니! 그토록 자신감 넘쳤던 베드로는 그 순간 죽음보다 더 깊은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철저히 무너져 내렸으리라!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다시 만난다. 밤새 애썼어도 아무것도 잡지 못한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는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는다(요한 21,1-14 참조). 베드로는 가슴 절절히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러한 깨달음 안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부족한 사랑이라도 주님께 온전히 봉헌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품어 안으시어 그 작은 사랑으로 큰일을 이루어주신다.


하느님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 그 하느님을 온전히 닮지는 못하여 늘 사랑하기 힘들어하며 애를 먹는 우리들이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늘 죄스러울 수밖에 없는 우리다. 여전히 우리는 내 편이나 내 가족이 아니면 내어주기 아까워하고 마주하기 불편해하며 참아주기 힘들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까워도 주고 불편해도 마주하며 힘들어도 참으려고 애쓰는 그 모습이 중요하다. 애쓰는 그 자체가 바로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이 말씀 그대로 우리는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높으신 주님처럼 그렇게 홀로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가 나무에 달려 있듯 그렇게 하느님께 매달림으로써 하느님다움이 내 안에 드러나는 것이리라! 그러니 하느님께 매달려야 한다. 그 매달리는 노력이 바로 베드로가 봉헌했던 필리아 사랑인 거다. 

 

출처 : 월간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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