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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7 10:49

부양이냐, 공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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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정훈 도미니코 신부

변신, 프란츠 카프카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갑옷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누워 있었고, 배는 활 모양의 갈색 마디들로 갈라져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이불은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내릴 것 같이 배 위에 간신히 걸쳐져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가여울 정도로 가느다란 다리 여러 개가 눈앞에서 무기력하게 떨고 있었다. 

 

220220 4면-변신 도서(홈피용).jpg

표지 출처: 예스24


그레고르 잠자는 출장 영업사원입니다. 피곤한 심신을 이끌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일은 무척이나 고단합니다. 4시에 일어나 새벽기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하여, 불규칙하고 형편없는 식사, 늘 달라지는 사람을 상대로 진정성 없는 만남을 반복하는 일은 스트레스 자체입니다. 그런 일상을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벌레로 변한 것입니다. 분명히 자신은 인간 그레고르인데, 보기 끔찍한 벌레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때문에 내가 참고 있지만, 그 이유만 아니라면 진작 사표를 던지고 사장 앞에 당당히 서서, 그동안 속에 담고 있던 말들을 모조리 쏟아냈을 거야. 그러면 사장은 책상에서 나자빠지고 말걸. 책상에 걸터앉아 높은 데서 직원들을 깔보며 말하는 그 꼬라지는 참 유별나기도 하지. 그나저나 아직 희망을 포기할 때는 아니지. 언젠가 부모님이 그 인간에게 진 빚을 갚을 만큼 돈을 모으기만 하면 -물론 아직 5,6년은 더 걸리겠지만- 무조건 그렇게 하고 말거야.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의 큰 전기가 되겠지. 그러려면 일단 일어나야 해. 기차가 다섯 시에 출발하니까. 


그레고르는 책임감이 강합니다. 벌레로 변해버린 지금도 자신의 처지보다 일을 더 걱정합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 왜 출근하지 않는지만 염려합니다. 그레고르를 찾아 집에 들이닥친 회사의 지배인도, 직무태만, 불만족스러운 실적에 대한 말만 내뱉습니다. 그는 지난 5년간 꾀병을 부리거나 아픈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에게 돌아오는 건 닦달과 비난입니다. 마음 같아선 이미 여러 번 사표를 던졌겠지만, 가족 때문에, 그는 참아낸 겁니다.


일벌레에서 밥벌레로 변신
당시 그레고르의 관심사는 가족 모두를 완전한 절망 상태로 몰아넣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를, 가족들이 최대한 빨리 잊을 수 있도록 전력을 쏟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열성을 다해 일을 시작했고, 순식간에 말단 직원에서 출장 영업사원으로 승진했다. 출장 사원에게는 돈을 더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실적은 즉각 현금 배당으로 돌아왔고, 집에 와서 그 돈을 식탁에 펼쳐 놓으면 가족들은 놀라워하며 매우 기뻐했다. 그때가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 그 후에도 그레고르는 가족 모두의 생활비를 감당해낼 수 있었지만, 찬란했던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가족이나 그레고르 모두 익숙해져서 이젠 당연한 일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가족은 고마운 마음으로 돈을 받았고, 그레고르도 기꺼이 내놓았지만, 애틋한 정 같은 것은 더 이상 없었다. 그래도 여동생만은 그레고르 마음 가까이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바이올린을 감동적으로 연주할 줄 아는 여동생을, 내년에 음악학교에 보내는 것이 그의 비밀계획이었다.


자신이 부모님과 여동생에게 이렇게 좋은 집에서 이런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에 그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데 이제 평안하고 넉넉하며 만족스러운 이 모든 삶이 끝난다면 어쩌지?
문이 잠겨 있던 아침에는 모두들 들어오려고 야단이더니, 그가 문을 활짝 열어 놓았고 다른 문들도 낮 시간 내내 열려있는 지금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걱정과 희미한 희망에 사로잡힌 채로 밤을 새웠다. 당분간은 조용히 처신하고 가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인내함으로써, 현재의 자기 상태로 인해 가족들이 겪을 불쾌한 일들을 잘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이었던 그레고르가 뜬금없이 벌레로 변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애초 그레고르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이미 벌레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겁니다. 일벌레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동시에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부양이냐, 공경이냐
여동생은 온갖 음식을 가져와 헌 신문지 위에 펼쳐 놓았다. 오래되어 반쯤 상한 야채, 저녁식사 때 먹다 남아 거의 굳어버린 흰 소스가 묻은 뼈다귀, 건포도와 아몬드, 그레고르가 이틀 전에 맛없다고 말한 치즈 조각, 마른 빵, 그리고 버터에 소금을 살짝 뿌린 빵이 있었다. 그는 툭 튀어나온 눈으로, 여동생이, 자기가 먹다 남은 음식은 물론, 입에 대지도 않은 음식마저 빗자루로 쓸어 담아, 이제 먹을 수 없다는 듯이 재빨리 통 속에 쏟아서 나무 뚜껑으로 덮은 후 밖에 내다버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엄마, 아빠, 더 이상은 이렇게 못 살겠어요. 전 이 괴물 앞에서 오빠라는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저것을 돌봐주고 참아내기 위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했어요. 그러니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비난을 퍼부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쫓아버려야 해요. 아버지도 저게 그레고르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저걸 오빠로 생각해 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우리의 불행이에요. 어떻게 저것이 오빠가 될 수 있어요? 저게 진짜 그레고르 오빠라면, 우리가 자기 같은 동물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쯤은 벌써 알아차리고 제 발로 집을 나갔을 거예요.

 
애초 일벌레 취급을 받던 그레고르, 그럼에도 꼭 필요한 존재였던 그가 밥벌레로 변신한 순간 숨겨졌던 민낯이 드러납니다. 가족을 먹여 살렸다는 사실도 잊혀지고, 앞으로 가족에게 도움이 될 거란 희망도 없는, 감사와 공경은커녕 부양해줄 이유조차 없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이제는, 가장 아꼈던 여동생이 앞장서서, 자신을 내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나이 드신 분이든, 일할 능력이 없는 이든, 그 누구에게든 절대적으로 주어져야 할 것은 부양이 아닌 공경입니다. 


현실 도피와 사회적 냉대의 결과
‘그럼 이제 어쩌지?’ 그레고르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어둠 속을 둘러보았다. 온몸이 아프긴 했지만 통증이 차츰 약해지면서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았다. 등에 사과가 박혀 썩어가고 있다는 것과, 그 주변에 퍼진 염증 부위가 먼지로 덮여 있다는 사실조차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는 감동과 사랑의 마음으로 가족을 회상했다. 그가 사라져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마 여동생보다 그 자신이 더 단호했을 것이다. 시계탑의 시계가 새벽 세 시를 칠 때까지 그는 공허하고 평화로운 사색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창밖으로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머리가 아래로 푹 떨어졌고, 콧구멍에서는 마지막 숨이 약하게 새어 나왔다.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숨 막히는 삶을 살던 그레고르, 그의 비참한 변신과 최후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동시에, 진짜 벌레가 되어서야 일벌레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삶의 몸짓을 통한 해방이 아닌, 힘든 현실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에서 촉발된 변신은, 그의 소외를 더 깊고 결정적으로 굳혀버립니다.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면, 사람으로 살게 하려면
食而弗愛 豕交之也 愛而不敬 獸畜之也. 식이불애 시교지야 애이불경 수축지야.
밥만 먹여주고 사랑하지 않으면 돼지와 사귀는 것이요,
사랑만 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짐승을 기르는 것이다.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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