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게 건강과 ‘어느 정도의 경제적 능력’이라고 한다. 그 어느 정도라는 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으나 건강과 경제적 기반이 행복을 느끼게 하는 여러 요소를 받쳐주는 기본이 된다는 게 보편적인 생각인가 보다. 자아실현, 성취감 같은 기준들도 있으나 그 성취감이라는 것도 물질적 이익이 수반되어야 느낄 수 있다고 하니 경제적 능력은 절대적 기준으로 보이기도 한다. 건강과 어느 정도의 경제적 능력이 행복의 기본이라고 믿는 이들은 오늘도 예수님 앞에서 건강, 취업, 승진, 사업의 번창 등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며 빌고 있다.
그러면 그 행복의 기본 조건이란 걸 갖고 싶어 하는 이들이 빌고 있는 그 예수님은 행복하셨을까? 모든 기준과 목표가 물질적인 이익에 있는 이 시대에 시대와 동떨어진 산상설교의 행복관을 내세우시는 예수님은 이 시대를 설득할 수 있을까?
지난주 복음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민족의 선지자 엘리야와 모세를 불러놓고 해처럼 빛나는 얼굴로 빛처럼 새하얗게 변한 옷을 입고 천상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투영된 듯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셨다고 한다. 제자들이 보기에 어쩌면 ‘우리를 영광스러운 자리로 이끌어주실 위대한 스승님’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위대한 스승님이 일신상에 안락함을 줄 재물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고, 참새도 가지고 있는 둥지조차 없어서 머리 누일 곳조차 없이 살다가 결국 자신을 따르던 이들에게 고발당해 비참하게도 사람들 앞에서 옷 벗김 당하고 매질 당하고 종국에는 벌겨 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거룩한 모습으로 다시 부활하셨지만,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니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일부 물려받아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행하고 권능을 떨치더니 각자 순교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이거 정말 잘 생각해야 할 듯하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하시니 부자 청년이 슬퍼하면서 떠나갔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 청년 따라 슬그머니 떠났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시대의 행복관에 따라 저 구약시절 야곱에게 내리신 축복을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내려달라고 청하고 있는데 정작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지니시지 않았고 그런 걸 주실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떤 분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가 사업이 어려워져 무당집을 찾았는데 무당이 시킨 대로 한 후 사업이 번창하자 교회를 접고 그 무당집을 교회 다니듯이 드나든다고 한다. 참으로 노선이 명확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이제 다시 한 번 결정해야 한다. 현세적 행복을 찾아 떠날지. 진리를 따라 참된 행복을 추구할지 내 신앙적 노선도 명확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