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이 없네.’
지난 여름날 아침마다 투덜거렸다. 36도는 예사로 넘겨버리는 더위로 텃밭 농사랍시고 몇 포기 심은 상추와 꽃씨는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게 할 만큼 뜨겁거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붓는 비를 몰고 온 태풍의 상처로 극과 극의 여름을 보내며 했던 말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중간’인 10월, 시원한 바람이 불다 못해 이불을 끌어당기게 되는 새벽에는 역대급 추운 겨울이 올 거라는 예보에 또 ‘중간’을 떠올렸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워야 하는 자연의 섭리는 접어 두어도 극명한 온도 차이를 보이는 계절이 있어서 오이냉국, 평양냉면, 동치미 같은 계절 음식이 맛깔나게 전해져 올 수 있었다. 여름 하면 모두의 첫사랑, <소나기>를 떠올릴 수 있고, <남한산성>을 읽으면 겨울을 버티던 궁벽한 삶이 절감되는데 당장 편한 ‘중간’만 있기를 바랐다.
지난주에 내가 가르치는 K가 구구곱셈 5단까지 외울 수 있게 되었다고 담임교사에게 자랑했다. 함께 외우고, 문제 풀이를 할 때는 너무 쉽게 잘 한다 싶더니 일주일 만에 2×1=2, 2×2=4…를 다시 암기시키게 되면서, ‘중간만 했으면’ 하며 안타까워했다. 띄어 읽기나 쓰기는커녕 글자는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린다. 연말까지 사칙연산과 기본적인 쓰기는 완성시키겠다고 했는데, 매주 되돌이표를 찍으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어 준 그림책 <비교와 측정>에 “흰발생쥐는 먹이를 구하러 갈 때 눈신토끼가 자기보다 몇 발자국 안 뛰고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기분 나빠할까?”라는 내용이 있었다. “눈신토끼 세 발자국은 흰발생쥐 몇 발자국일까?” 하고 물었더니 3×3=9 대신, “흰발생쥐가 되고 싶다”고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몇 등인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연봉이 얼마인지, 몇 평에 사는지 비교하며 살다가 되돌이표로 돌아가 내 아이가 몇 등인지, 어느 학교에 갔는지 비교하며 ‘중간’은 되어야 선 안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뭐든 ‘중간’에 들기만 바란 선생에게 K는 눈밭을 뛰어다니는 흰발생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축구도 잘하고, 아껴 둔 용돈으로 막냇동생에게 줄 과자를 사서 달려가는 다정다감한 형, 반 친구들이 볼세라 복도를 걷는 척하다 연구실에 몰래 들어와서 공부하지만 수업에 빠진 적은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잘 깎아 둔 연필을 꺼내다가 인사를 잊었다고 벌떡 일어나서 문 앞까지 가서 다시 인사하며 들어오기도 했다.
“선생님! 눈신토끼도, 흰발생쥐도 수학이 필요할까요?”
가만가만 K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음 그림책을 함께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