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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황광지 가타리나/ 가톨릭문인회

240512 강성삼 신부(홈피용).jpg

강성삼 라우렌시오(1866~1903) 출생
강성삼은 1866년 7월 충남 홍산군 오시대밭 출생이다. 아버지는 1866년에 순교한 강 시메온, 어머니는 신  아가다로 성 손자선 토마스와 외척이 된다. 외할아버지 신 베드로와 외숙부 신 아우구스티노는 1866년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강성삼의 형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형이 한 명, 누나 이사벨라와 마리아이다. 이사벨라는 1866년 다블뤼 주교가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되는 장면을 목격할 때 자신이 11살이라고 밝힌 증언이 있어 가족들의 출생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마리아는 언니보다 2살 어려 강성삼과 9살 차이다.


험난한 성소의 길
순교자 집안의 강성삼은 1881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코스트 신부의 지도로 1년간 예비교육을 받고 1882년 16세에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로 파견되었다. 페낭신학교는 페낭섬에 세운 신학교인데, 박해로 신학교를 세울 수 없는 조선과 중국 등 동양 10여 개의 나라에서 온 학생들을 양성하기 위한 연합신학교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우도 신부가 페낭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1888년 11월부터 1890년 10월까지 조선인 학생들을 담당했다. 페낭신학교는 안정적인 지역에 설립되었으나 열대지방에 있어서 풍토병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우도 신부도 건강이 악화되어 조선으로 떠나게 되었다. 강성삼은 여기서 폐병을 얻어 고생하였고, 1890년 1월에 먼저 조선을 향해 떠났다. 다른 동기들은 그해 11월에 페낭을 떠났다.


강성삼은 국내에서 학업을 계속하였으나 페낭에서 7년 동안 공부하면서 얻은 폐병으로 매우 고생했다. 1892년 3월에 다른 페낭신학교 출신들과 삭발례를 받았어야 하지만 1년 연기되었고, 삭발례를 받던 1893년 3월 전날의 각혈이 심해 성체를 영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1895년 12월에는 부제품을 받았다. 


건강악화로 자칫 사제품이 보류될 뻔했으나 1896년 4월 26일, 페낭신학교 입학한 지 14년 만에 뮈텔 주교의 주례로 서울 약현성당에서 서품되었다. 강성삼(30세)은 강도영 마르코(33세), 정규하 아우구스티노(33세)와 함께 용산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김대건(1845년), 최양업(1849년)에 이어 세 번째 방인 사제이나 최초 국내 사제서품이라는 큰 의미를 갖는다.


경남지역 명례성당에서 사목     
사제 서품을 받은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는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896년 5월 21일 페낭신학교 스승인 우도 신부가 사목하고 있는 부산에 당도했다. 초량사제관에서 우도 신부와 10일 동안 머무른 후 절영도의 조내기 부락으로 건너갔다. 이곳의 심한 바람으로 인한 두통 때문에 겨울을 지낼 수 없다며 뮈텔 주교에게 호소하여 12월에는 대구의 로베르 신부 사제관에서 보름가량 지내다가 부산으로 돌아왔다. 


병약한 강성삼은 절영도 사목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우도 신부와 상의하고 뮈텔 주교에 요청하여 명례로 옮기기에 이른다. 1897년 가을 즈음 명례에 방이 세 개 달린 집 한 채를 120냥에 구입하였다. 그 겨울부터 명례에 거처를 옮긴 후 새로이 네 칸짜리 집 한 채를 짓는 계획을 세웠다. 우도 신부의 공소로 있었던 명례공소는 강성삼 신부의 부임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교세가 상당히 성장하였다. 강 신부가 담당하던 여러 공소 중에서 가장 컸던 명례의 교우수는 78명에서 144명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1899년에 강 신부의 위상을 높인 두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경북 자인의 정 그레고리오가 밀양 손참봉으로부터 누이의 딸을 찾으려는 일이었다. 흉년에 돈을 주고 산 여자아이를 돌려주려고 하지 않아, 정 씨는 밀양군수에게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여 강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강 신부는 로베르 신부에게 부탁하고, 뮈텔 주교에게 알리면서, 서울에 가서 재판을 청하겠다는 입장을 군수에게 표명하자 두려워하며 사람들을 석방하고 용서를 구했다.

 

240512 명례성당 평면도(홈피용).jpg명례성당 평면도

강성삼 신부가 건립한 명례성당
택지면적 688평
건물 평수 52평 8합 7작- 성당 17평 25,
신부실 11평 66, 응접실 11평 66, 대문 6평 15, 
마구 6평 15

 


또 하나는 명례에서 강 신부가 구입한 토지와 관련된 것인데, 강 신부는 한 과부에게서 밭을 매입했는데 정식 매매문서가 있어 문제가 없었다. 그 과부와 의붓아들이 문제를 일으켜 손해를 보게 된 사람이 밀양 군수에게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오히려 군수는 그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잘못을 저질렀다. 강 신부는 다케 신부에게 도움을 청해, 갇힌 사람들은 석방시키고 밭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 두 사건의 처리로 강 신부의 이야기가 지역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한 증인에 따르면 명례마을 노인들이 강 신부를 ‘강대인姜大人’이라 불렀다고 한다.

 

240512 강성삼신부님 초상화(홈피용).jpg

박강원 화백의 ‘강성삼 신부 초상’

 


강 신부는 거룩한 사제로 또 지역사회의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학교도 만들어 교육사업에도 힘쓰며 신자와 비신자 구분 없이 어린이들을 받아들였다. 강성삼은 1903년 선종하기까지 6년간 명례성당에 머물며 아픈 몸을 견디고 사목을 수행했다.


1903년에 접어들어 강 신부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1903년 9월 19일 저녁 5시 20분 무세 신부에게서 종부성사를 받고 37세 나이로 평온하게 선종하였다. 임종을 지켜본 무세 신부는 “헛소리를 하면서도 신부는 교회일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미사를 드리고, 조선인들이 천주교인이 되려 하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등의 말을 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시신은 명례에서 8㎞ 떨어진 대미공소에 안장하였다. 이후 1904년 초 뮈텔 주교의 허락을 얻어 로베로 신부의 주도로 무덤에 작은 비석이 설치되었다. 강 신부의 유해는 1977년 용호동 천주교묘지로 이장되었으며, 묘비는 삼랑진성당 성모당 경내에 보존되어 있다가, 언양성당으로 옮겨졌다.

 

▶참고: <천주교마산교구40년사> <완월동성당120년사>

천주교대구대교구 자료 <뮈텔 주교 일기> 명례성지역사자료집<명례의 빛을 따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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