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21.11.04 13:22

거리두기

조회 수 58
Extra Form
저자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9-10)


코로나로 공동체 미사가 전면 중단되었을 때의 어느 날인가 텅 빈 성당에 홀로 앉아 무심코 복음서를 들척이던 중 특별히 눈에 들어왔던 대목이다.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로 물러가셨던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이 당신께로 밀려들자 호수에 거룻배 한 척을 띄우시고 그 위에 오르시어 마치 무대에서 객석을 바라보듯 호숫가에 모여 있는 군중을 향하여 말씀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모습, 다름 아닌 ‘거리두기’가 아닌가!


‘코로나’라는 전 세계적 전염병의 예방과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인 요즘 예수님의 이 모습은 거리두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한다. 피하는 거리두기가 아닌 살피기 위한 거리두기, 멀어지는 거리두기가 아닌 다가가기 위한 거리두기, 각자 살아가는 거리두기가 아닌 함께 살아가려는 거리두기다. 그러고 보면 거리두기란 코로나 방역을 위한 고육지책이기 이전에 이미 우리 모습 안에 자리하는 삶의 원리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코로나 상황이 지속되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삶의 스트레스가 심해지는 이때에 하루빨리 상황이 진정되어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이 시대 모든 이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단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으로의 회복을 염원하는 우리는 지금 코로나 시대의 거리두기를 복음의 빛으로 새롭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 시대의 거리두기가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으면 잘 보이고 멀어지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지만 우리 삶에는 그 반대인 경우가 존재한다. 거룻배의 예수님과 호숫가의 군중처럼,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잘 보이지 않아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만 제대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바짝 붙어 있을 때는 알 수 없다가 한 걸음 물러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는 그런 경우가 참 많다. 복잡한 길 한가운데에서는 길이 잘 보이지 않지만 길에서 떨어져 높은 곳에서 굽어보면 복잡한 길들이 한눈에 들어와 길이 잘 보인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당사자보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그 판을 더 잘 읽을 때가 있다. 승부욕의 중심에 있을 때보다 거기서 한 걸음 물러서 있을 때 전체적인 상황이 눈에 잘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가 하는 피정도 거리두기를 신앙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예라 할 수 있다.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줄임말인 피정避靜은 말 그대로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 속 일상과 잠시 거리를 두고 벗어나 주님 안에 고요히 머물며 스스로를 성찰하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 속에 파묻혀 살아가면서 미처 살피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것을 피정이라는 거리두기를 통해 살피고 깨닫게 되는 거다. 이처럼 거리두기라는 것은 우리 삶의 다양한 모습 안에 자리하면서 우리가 대상을 바르게 보고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피하고 멀리하고 분리하는 거리두기가 아니라 살피고 만나고 어우러지기 위한 거리두기다.


그런데 문제는 이 거리두기라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거리를 둔다는 것은 대부분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고 편안한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맛 들인 것을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게 쉬울 리 있겠는가! 그래서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거리두기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정말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곤 한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보라! 교통과 미디어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비약적 발달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진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서로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날아갈 수 있는 시대다. 수없이 많은 CCTV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일일이 살필 수도 있고 SNS를 이용해 수시로 의사를 전달하거나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만큼 사람과 사람들 사이가 더 가까워지고 친해졌을까?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정말 알아야 할 것들을 제대로 알아가며 살고 있을까? 아니, 결코 그렇지 못하다. TV를 켜고 신문을 펼치고 핸드폰을 보지만 옆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 하나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살아간다.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얼굴이 흙빛이 되어가도 도통 알지를 못한다. 살고 싶다는 아우성을 그저 짜증이나 심술 정도로 알아듣는다. 그러다가 나중에 큰일이 생긴 후에야 그런 줄 몰랐다고 이야기하는 게 고작이다. 세상살이가 다 그런 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아가지만 바로 내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알지 못하고,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미세먼지 농도는 알아도 환경오염과 기후위기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늘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열심히 듣고 누군가를 열심히 만나며 살아가지만 정작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은 듣지 못하고 만나야 할 것은 만나지 못하며 살아간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가난한 라자로가 가까이 있을 때는 안중에도 없더니 죽어 지옥으로 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알아보고 소리치는 부자의 때늦은 후회를 우리도 뒤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루카 16,19-31 참조)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모두에게 참된 거리두기가 절실히 필요하다.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떠나라, 떠나라, 거기에서 나와라.”(이사 52,11) “너희는 발길을 돌려 갈대 바다 길을 따라 광야로 떠나라.”(신명 1,40) “허물어라.”(요한 2,19) 주님의 이 말씀처럼 이 시대 거리두기의 삶은 광야와 같을 수 있고 때로는 공들여 쌓은 탑이 허물어지는 충격일 수도 있다. 낯설고 불편하고 외롭고 뭔가 많이 힘들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자리한다. 그러나 광야 이전의 삶은 ‘종살이’(탈출 1,1-22 참조)요, 허물어진 곳은 ‘바벨’(창세 1-9 참조)이 아니던가! 그러니 이겨내야 한다. 정녕 약속의 땅은 광야를 거치고 부활은 십자가를 통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출처 : 월간 생활성서

 

211107 5면 백그라운드 사본(홈피용).jpg

 


  1. 기도 중의 분심: “분심이 든 적이 없다면 기도할 줄 모르는 것이다”

    Date2021.11.11 Category현대 영성 Views1379 file
    Read More
  2. 거리두기

    Date2021.11.04 Category문화읽기 Views58 file
    Read More
  3. 죽음 생각

    Date2021.11.04 Category한 말씀 Views73 file
    Read More
  4. 기도를 어떻게 하면 더 잘 바칠 수 있을까?

    Date2021.10.28 Category현대 영성 Views122 file
    Read More
  5. 새로운 세대의 경제교육

    Date2021.10.28 Category렛잇고 문화 렛잇비 신앙 Views67 file
    Read More
  6.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Date2021.10.21 Category현대 영성 Views116 file
    Read More
  7.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편히 휴식하는 길”입니다

    Date2021.10.07 Category현대 영성 Views101 file
    Read More
  8. 적당하게

    Date2021.09.28 Category문화읽기 Views215 file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 33 Next
/ 33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