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
2024.02.15 10:17

인간의 돌봄과 하느님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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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예수 성심 시녀회/ 진동 요셉의 집

240218 진동요셉의집 사진(홈피용).jpg

 

진동 요셉의 집에는 6명의 수녀가 농사를 짓고 있다. 21세기 자본주의 첨단의 문화 안에서 몸 쓰는 일보다는 머리 쓰는 일에 더 가치를 두는 오늘날.


우리는 굳이 이 힘든 일을 왜 하고 있을까? 


소비의 극단을 달리며, 낭비의 문화가 견디기 힘들고 물, 땅, 공기의 오염은 숨이 막힐 것처럼 목을 조여오는 느낌이다. 이대로 살고 싶지 않고 내 손으로 지구의 한 귀퉁이라도 덜 오염시킬 수 있다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을 뿐, 무엇보다 우리가 돌보고 가꾸는 만큼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는 자연이 고맙고 인간적이어서 좋다.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농법으로 시작한 농사이기에 처음에는 주변에서 힘들 거라고 걱정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들도 우리 방법을 접목한다. 


5월 말에 교육이 있어서 며칠 진동을 떠났다. 연일 3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 5월 초에 심은 고추 모종들은 사흘이 멀다 하고 물을 줘도 비실거렸지만,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겠지 하면서 설마 4일 동안에야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없는 사이 피정이 있어서 남아 있던 수녀들은 피정자들 뒷바라지하느라 아직 어린 고추밭에 가볼 시간이 없었나 보다. 돌아오니 가뭄과 뜨거운 태양을 견디지 못하고 고추가 100포기 넘게 말라죽었다. 속상하고 걱정이 된 수녀들은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주일에도 쉬지 못하고 포기마다 물을 듬뿍 주고, 신문지로 우산을 만들어서 씌워보았지만 효과는 크게 없었다. 수심 가득한 수녀들을 다독였지만 마음은 울고 있었다. 차마 빈 땅으로 둘 수가 없어 시장에 갔더니 아무도 데려가지 않은 부실한 고추  모종이 조금 남아 있어 사다 심었다. 6월 1일인데 가능할까? 그렇게 심어놓고 이젠 하느님 손에 맡겼다.


습관처럼 눈뜨면 일기예보부터 확인한다. 두 달 가까이 감감무소식이더니만 혜성처럼 비 소식이 뜨고 드디어 단비가 대지를 적실만큼 충분히 내려주고 있었다. 긴 가뭄 끝에 내리는 꿀맛 같은 단비다. 우리를 포함한 대지의 모든 생명체들이 환성을 올리며 찬미의 송가를 부른다. 다행히 늦게 심은 고추도 단비 덕분에 뿌리를 잘 내렸다.


농사를 지으면서 자주 숙고하는 주제가 있다. 돌봄의 주제와 하느님의 영역이다. 자세히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작물의 필요가 보인다. 모름지기 모든 생명은 세심한 관심과 돌봄을 통해서 성장하고 완성되어 간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를 비로소 알아듣는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정성으로 돌본다고 해도 일정 부분 하느님의 영역이 있다. 세상 창조 후 하느님이 첫 사람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시면서도 마지막 보루로 선악과를 당신의 것으로 남겨 두신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허용 너머에 당신의 것이 존재함을 배운다. 


자신의 한계 내에 머물 때,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세상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창조질서가 보전된다는 보편진리. 100포기의 고추 모종을 죽이는 대가를 치르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의 돌봄과 하느님의 영역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삶에서 파생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하느님의 자리에 내가 있을 때 혼란이 일어나게 되고, 하느님이 되려는 무질서한 집착으로 이 한계를 지키지 않았기에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과 인간, 자연의 창조질서가 깨져버린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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