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3.06.29 10:28

간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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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규준 바오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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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노을처럼 시나브로 내리던 눈이 갑자기 엄지손톱 크기의 우박으로 변하여 평온했던 도시에 곰보처럼 상처를 내던 몇 해 전, 아이를 배웅하기 위해 역을 찾은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나의 시야에 들어온 역의 풍경은 각종 비품과 시설물이 세련되고 현대화되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옛날에 비하여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학창 시절, 직장 생활을 하면서 기차를 즐겨 이용했었다. 무엇보다 안전하다는 장점 외에, 덤으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누구의 간섭도 없이 고즈넉이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동안 성장하면서 세월의 구비마다 갖가지 사연을 거쳐 온 역마다 남겨 놓았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찾은 역이었지만 옛 친구를 해후한 것처럼 전혀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역은 수풀 우거진 깊은 산속의 동굴과 같다. 오랜 세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태생의 비밀과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동굴, 그 동굴은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있다. 동굴은 산속에 있으면서 산의 구성원이지만, 산 고유의 개념 및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역 또한 도시 가운데 존재하고 있지만 고립된 섬과 같은 이방인의 느낌을 준다. 크기를 알 수 없는 우주 속에 지구가 있다면, 지구 안에 또 다른 지구의 축소판인 역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역은 만남과 이별의 장소이며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이다. 간이역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각기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사연을 만들어 놓고 떠나간다. 인생의 항로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모습의 사건과 사연들이 화석처럼 쌓이게 된다. 우리는 태어나서 이승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역을 거쳐 간다. 그동안 거쳐 간 역들은 종착역이 아닌 간이역인 셈이다. 거쳐 온 간이역들의 궤적을 연결하면 인생이 되는 것이다.  


간이역마다 삶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그동안 거쳐 온 간이역마다 손짓 하나, 발짓 하나, 심지어 숨소리까지 지워지지 않은,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생의 파노라마가 만들어 놓은 이승의 발자취이다. 나는 그동안 짧지 않은 삶의 바다에 노를 저어 오면서 수많은 간이역을 거쳐 왔다. 힘겹게 거쳐 온 역들은 모두 종착역으로 가기 위한 간이역이었다. 그럼 종착역은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지금 어느 곳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가고 있는가. 이승의 종착역은 분명 죽음일 것이다. 단지 죽음이 종착역이라면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너무 비참하지 않는가. 세상의 부귀영화를 탐하는 사람들의 종착역은 분명 지구에서 맞이하는 죽음일 수도 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하게 된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은 우리가 가야 할 종착역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죽음은 부활로 이어질 것이며, 부활의 종착역은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이다. 처음과 끝이 없는 영생이 시작되는 곳이다.


흘러간 강물은 돌이킬 수 없듯이, 간이역마다 남겨둔 삶의 궤적은 지울 수가 없으며, 도돌이표가 있어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오욕의 역사를 지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참회와 보속, 앞으로의 신앙생활이다. 자유의지로 걸어가야 할 앞으로 삶은 오로라처럼 찬란하지는 않더라도 하느님께 부끄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이승에서 마지막 종착역에 도착했을 때, 그래도 괜찮은 삶이었다고 떳떳하게 고백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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