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 3월, 뜻밖에도 어머니가 담임선생님으로 우리 반 교실에 나타났다.
나는 어머니 앞에서 선생님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입 꼭 다문 채 잔뜩 긴장했다. 교단에 오른 어머니의 첫 훈화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로 시작되었다. “듣기 좋은 말과 꾸며낸 웃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조심할 것”이며, “귀를 솔깃하게 하는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둥. “교묘한 말로 아부하는 사람치고 착하고 어진 사람 없으니, 말재주가 없어서 말을 잘하지 못해도 진심으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재미라곤 1도 없었던 훈화는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는 속담으로 마무리되었다.
한동안 ‘말 한마디로 어떻게 천 냥 빚을 갚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달콤한 유혹에 마음이 끌릴 때마다 그날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잘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과하게 반기며 추켜세우면 우선 경계부터 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말과 얼굴 표정에 따라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지는 걸 실제로 경험하기도 했다. 때로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이 황당한 일을 당하여 할 말을 잃어버릴 때도 있었다. 나이를 먹고 삶이 무르익을수록 어머니가 들려준 그 말들을 떠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더불어 살아야하는 사회생활에서 훌륭한 말솜씨는 최고의 처세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의·식·주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겼던 말들은 내 기억 속에서 반짝이다 잊혀졌다. 그 가운데는 옛날이야기처럼 들려주었던 성경내용도 있었다. 이제는 내가 아이들에게 어머니처럼 말하고 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겸손한 말을 하면 존경을 받고, 진실한 말을 하면 신뢰를 얻는다”고. 떠도는 좋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 대충 넘겨듣고 있다. 어쩌면 잔소리 같기도 해서 지긋지긋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묘약이 되기도 하는 걸. 악의에 찬 한마디 말이 흉기가 되어 심장에 꽂히기도 한다는 걸.
돌아보니 생전의 어머니는 평생 말로써 나를 압도했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다시 볼 수는 없지만 어머니의 그 말을 기억하며 거스르지 않고 따르는 한 언제나 내 안에 살아있다.
아뿔싸! 내 안에 어머니보다 더 나를 압도하는 이가 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나타난 그분은 호산나 외치며 환호하는 군중,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야단법석을 떠는 군중. 머지않아 싸늘하게 돌변할 군중을 통과해 내 안에 와 있다. 뭐라 할 말을 잃어버린 그분의 소리 없는 말씀이 어느 사이 심장에 닿아 쿵쿵~ 쿵! 나를 압도하고 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이사 50,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