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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윤종두 요한 신부/ 교구 이주사목센터장

231119 11월 이주민원고 백그라운드(홈피용).jpg

 

지난 1월 이주민센터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필리핀 공동체의 한 젊은 자매가 요통과 복통을 호소하여 신경외과와 산부인과 진료를 동행한 적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유의미한 정도의 질환은 아니었다. 진료 후 가벼운 마음으로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가족사를 듣게 되었다. 필리핀의 여느 평범한(?) 가난한 가족들의 모습과 비슷하게 10여 명이 함께 모여 살고 있으며, 이 자매 홀로 집을 떠나 타국에서 돈을 벌어 나머지 식구를 먹여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매에게는 특별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심장질환을 가지고 있는 큰 딸이 본국을 떠나온 가장 큰 이유였다. 2007년 23살의 나이로 얻은 첫 딸의 병명은 팔로 4징증(Tetralogy of Fallot) 이었다.


팔로 4징증은 우심실에서 폐로 가는 혈관인 폐동맥 입구의 협착, 좌심실과 우심실을 나누는 중간벽(중격)의 구멍(결손), 대동맥의 위치가 정상보다 오른쪽에 치우침(대동맥 기승), 우심실이 비정상적으로 커짐(우심실 비대증) 등 4가지 해부학적 이상을 갖고 있는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수술을 하지 않으면 1~2세까지의 사망률이 46%에 이르고, 20세까지의 사망률이 90퍼센트까지 이르는 무서운 병으로 수술 방법도 어렵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형편에 학교도 장학금으로만 다녀야 했던 이 여인은 대학 시절 식품공학을 전공하다 밴드 보컬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겨, 학교를 그만두고 생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때부터 동생들 학비와 생활비를 챙기며 살았다. 임신과 출산으로 일을 그만두었으나 첫아이의 심장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곧바로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맞벌이로 겨우 생활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간헐적으로 아이의 무산소 발작에 응급실로 실려가는 경우가 생겨, 일을 그만두고 아이 곁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심장재단 등에 등록하고 아이의 심장을 고칠 수 있는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으나, 수년이 지나도 긍정적인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고는 큰 결정을 내렸다. 국내에서 일해서는 아이의 병원비도, 생활비도 감당할 수가 없다는 판단에 해외시장에 목소리를 팔러 가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유명한 가수로서 큰 공연 수입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가진 달란트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밴드의 보컬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다른 일반 노동자들과는 달리 근로계약서가 아닌 공연계약서를 쓰고 호텔 라이브 밴드 바에서 가수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공연계약서에 명시된 임금은 한국 돈 1백만 원이었다. 나도 그 공연계약서를 보면서 눈을 비비고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숫자가 잘 못 표기된 줄 알고 말이다. 공연 때마다 손님들의 팁을 모아서 밴드 전체가 나누어 가지는 것이 봉급 외의 유일한 수입원이다. 해외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며 아이의 수술비를 마련하고자 했던 이 엄마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다행히 아이의 일상생활은 지장이 있어도 무산소 발작 등의 횟수가 줄어 병원비로 지출되는 비용이 줄어들고 있었다. ‘기적적으로 아이의 병이 낫지는 않을까?’ 하며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올해 초부터 아이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에서 무산소 발작으로 응급실에 실려가기 시작하였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오르고 5월에는 무산소 발작에 의식까지 잃고 응급실에서 비로소 다시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제 딸아이의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엄마의 마음은 걱정으로 가득 찼다. 미사에 와서 딸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주민센터장인 나에게도 딸아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하였다. 안쓰러웠지만 내가 의사가 아니라 고쳐줄 수도 없고, 그저 손을 꼭 잡고 기도하겠다고 위로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의 의료진과 다른 일로 회의를 진행하다 우연찮게 이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치료 비용에 대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약속을 받게 되었다. 기적적이었다. 급하게 이 아이를 국내로 데리고 와서 정밀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하기 위한 절차가 6월부터 시작되었다. 현지 심장센터의 의무 기록을 요청하고 심장카테터 검사 등을 진행하며 현재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한국 입국을 위한 체류허가를 위한 준비도 함께 시작하였다. 여권을 만들면서 아이는 식어가는 것 같은 자신의 생명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기대로 가득 찼고, 이주민센터는 매일 화상으로 9일 기도를 함께하였다. 온라인의 힘을 빌려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온 가족이 9일 기도를 드리며 영적으로도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하지만 아이의 간병을 위해 동행할 가족의 출생신고서 띄어쓰기 오류가 이 준비과정을 중단시켰다. 국내로 함께 올 수 있는 가족들 모두가 출생신고서의 띄어쓰기 한 칸이 잘 못돼서 여권발급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수정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6개월… 탄원서도 만들어 보내고, 여러 공식적 요청을 했지만 필리핀 외교부의 긍정적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두 달여간을 띄어쓰기 한 칸 때문에 아무런 절차 진행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내가 직접 가서 아이를 데리고 와 간병 등의 문제는 다시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급하게 필리핀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오려 했지만, 미성년자의 치료 목적을 위해 해외로 출국하는 데는 현지의 복지부가 걸림돌이 되었다. ‘출국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담당 의료진의 국내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술이 담긴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의료기술의 문제를 떠나서 금전적 문제가 이 아이를 16년 동안 고통스럽게 한 것인데… 사실상 출국 허가서를 받아내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띄어쓰기 문제로 시작해 행정절차상의 문제로 한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만 보는 것이 내 마음에 허용이 되지 않았다. 복지부에 가서 부탁하고, 떼를 쓰고… 결국 6시간 동안 필리핀 복지부에서의 사투(?) 끝에 허가서를 받아 한국으로 함께 들어왔다. 띄어쓰기가 잘 못 되지 않았으면 아이는 벌써 수술도 받고 회복하고 있지 않았을까? 여하튼 지금은 국내에 들어왔다. 지금은 정확한 진단과 치료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정밀검사 단계에 있다. 한 아이의 생명이 띄어쓰기 한 칸의 실수로 사라질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아이가 심장병을 고치고 나면 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고 한다. 또래 친구들과 K-pop 댄스를 추고 싶단다! 이 아이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싶다.

 

231119 11월이주민사목 원고 사진(홈피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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