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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우현 십자가의 요한 신부/ 광주가톨릭대학교

온 피조물에 마땅한 자리를 부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로 정향된 인간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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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성조들, 모세, 다윗, 예언자들로부터 우리 주님께 이르는 구원 역사를 풀이한 뒤,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을 증언합니다(사도 7,2-56). 이 증언을 들은 이들의 반응은 살의로 귀결되는 격분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분노하게 하였습니까?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당신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힘은 ‘분리, 구분’, ‘경계 지음으로써 자리를 부여함’에 있습니다. 빛과 어둠을 가르시는 분. 물과 땅 사이의 경계를 세우시는 분. 낮과 밤, 계절들의 경계를 부여하시는 창조주 하느님. 그렇게 시공간을 품은 우주에 모든 생물 고유의 자리(새에게 하늘, 물고기에게 물, 들짐승에게 땅)가 세워집니다. 식물이 작은 짐승의 먹이가 되고, 작은 짐승은 큰 짐승의 먹이가 되듯, 온 피조물의 탄생은 항상 자기를 초월하는 우주적 질서 하에 죽음에로 귀결되지만, 그마저 숭고하며 거룩합니다.


이런 원초적 질서 가운데 우리 인간이 부여받은 자리는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 곧 하느님의 모상입니다(창세 1,26-28).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유비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말을 통해 실현됩니다. 당신을 닮아 지배하고 다스리라 하신 그 말씀에 따라 인간은 온 피조물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경계를 세우고 고유의 자리가 있게 합니다(창세 2,19-20).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의 말 역시 경계와 자리를 표현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쉬운 예로, 친한 친구에게 별명, 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는 일은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그 친구를 표현하는 일이요 내 나름의 기준으로 그 친구에게 자리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한편, 구원 역사 안에서 우리 인간의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모방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그 말씀과 온전히 하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존재를 제 자리에 배치하시는 하느님,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시고, 없어야 할 것들은 그저 없게 하시는 당신의 말씀과는 다르게 인간은 늘 ‘자기중심적인’ 자리 배치를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 자리 배치’에 본능적으로 힘쓰는 데 비해, 다른 존재의 자리를 배치함에 있어서는 무감각하거나 잔인할 정도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이 구도에서 스테파노가 순교를 당한 이유가 뚜렷해집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그의 증언은 실로 그 누구의 말과도 다르게 하느님의 말씀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하느님의 자리를 명시함으로써 온 피조물이 제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힘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자리 배치를 수행하는 인간들은 자기들의 말과 너무나도 달랐던 스테파노의 말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싶었던 자리와 하느님께서 부여하시는 자리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리에 대한 욕망의 결과가 곧 스테파노의 순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말은 어떤 자리 배치를 수행하고 있습니까? 온 피조물이 제 자리를 찾아갈 때 하느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창조 질서가 바로 서고 생명과 축복이 세상에 가득 찰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테파노의 말은 자기를 위한 자리 배치이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에 맞닿은 거룩한 말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잘 배치함은 결국 다른 이들의 자리를 옳게 배치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첫 순교자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의 말이 온 피조물에게 마땅한 자리를 부여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을 닮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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