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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우현 십자가의 요한 신부/ 광주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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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말씀 그 자체이신 분과 다른 이들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을 성사시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일찍이 그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의 실재를 천명했습니다(요한 1,29). 요한의 증언에 이끌린 두 제자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실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을 금세 마주하게 됩니다.


당신의 뒤를 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주님께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그러자 그들은 “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한국 가톨릭 성경이 “묵고 있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동사 ‘메노’를 직역하면 “어디에 머무르십니까?”라는 말이 됩니다. 요한복음 내에서 “머무르다”라는 주제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 내 위치, 거주뿐만 아니라, 한 존재의 근원 및 본질을 드러내는 신학적 공간 내 머무름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 1,32-33에 따르면, 성령께서 하느님의 어린양 위에 머무르십니다. 또 요한 14,10에 따르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드님 안에 머무르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한 아드님께서 당신 제자들 안에 머무르실 수 있으며 제자들 또한 그분 안에 머무르도록 초대받습니다(요한 14,25; 15,4-7).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찾는 것, 곧 당신이 머물고 계시는 곳을 그들로 하여금 보게 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이렇게 당신께서 어떤 분인지를 훤히 밝히시는 이 말씀이 이미 세상의 죄에 역행하는 말씀입니다. 원초적 인간 아담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겨 죄를 짓고 난 뒤 그분으로부터 자기 몸을 숨깁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아담을 찾아 주셨지만, 그는 더 이상 하느님 앞에서 알몸으로 자기 모든 것을 훤히 보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새 아담이신 주님께서는 옛 아담이 자아낸 숨어드는 인간의 구도를 뒤집으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질문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지금 어디 계시냐는 질문을 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어디에 머무르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분은 몸을 숨기시지 않고 와서 보라 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십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머무르시는 곳에서 그날 그분과 함께 머무르며(요한 1,39) 강생하신 하느님 말씀, 새 아담을 만나게 됩니다. 이 구도에서, 제자들이 우리 주님과 함께 “오후 네 시쯤”까지 머물렀다는 이야기(요한 1,39)는 실로 그들이 하느님의 어린양과 함께하였음을 암시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의 제사를 성취하신 시간이 오후 세 시이지요. 그 후 십자가에서 그분 시신이 내려지며 제사가 마무리되는 시간이 “오후 네 시쯤”으로 추정됩니다. 일종의 예형으로서, 두 제자들이 하루 동안 주님께 머물렀던 시간이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이루시는 제사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셈입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은 퇴색되어 가고 익명성 뒤에 숨어드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에게 필수적인 사회성이라는 덕목도 자기 말과 표정, 행동 뒤에 스스로의 민낯을 잘 감출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합니다. 이렇듯 숨어들 수밖에 없는 우리 모습 가운데 갈등과 불화, 죄가 자리합니다. 새 아담께서 “와서 보아라” 하시는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숨어들며 혼자 죽어가는 우리를 계속 당신께로 불러내셔서 숨통이 트이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 말씀 안에 머무르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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