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2.12.26 17:04

여지와 여백으로의 초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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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유철 스테파노 시인

새해! 첫날!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 대한 평화를 염원하고 덕담과 기쁜 인사를 나누는 날입니다. 또한 2023년 365일에 자신의 숨결 따라 새겨질 발자국을 미리 ‘곰곰이’(루카 1,29) 생각해 보는 한 해 중 가장 소중하며 진실 앞에 마주 서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는 외지를 자주 다니는 편입니다. 낯선 마을을 갔을 때 성당을 만나면 가급적 일부러라도 들어가곤 합니다. 서울에 갈 때는 명동성당을 거의 빠뜨리지 않습니다. 서울이란 곳, 명동이란 곳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길도 복잡하고, 사람도 많고, 행사도 1년 내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성전 안으로 들어가면 조용합니다. 대개 비어있고요. 이렇게 복잡하고 좀 혼란한 도시 안에서 비어있는 공간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저로서는 내심 떠올리게 되는 것은 참으로 이 도시를 생기 있고 발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이렇게 비어있는 여백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바빠, 바빠”를 일과처럼 여기는 삶일수록 여지가 있어야 하고, 여백이 있어야만 하느님 앞에서 더 생기발랄한 신앙인이 될 것임을 새삼 되새깁니다. 물론 그 여지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자리라고 여기며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에서 하신 말씀을 찾아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사도 22,22-23)


바오로 사도가 선포한 것처럼 ‘하느님’이라고 적어놓아야 할 제단 앞에 사람들은 ‘돈’, ‘명예’, ‘1등’이라는 명패를 붙여놓고 싶어 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사람들이 차지하면서 오늘날의 불행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요?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의 삶은 하느님 앞에서 거룩한 여백이 있는 삶, 그런 관계 속에서 만드는 여지가 더욱 맑고 향기로운 삶이 펼쳐진다고 여깁니다.


새해를 앞두고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에 며칠 머물렀습니다. 당연히 기도의 깊이와 시간이 평소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껴졌습니다. 공간의 힘이었겠지요. 미국 도시계획학자 헤이든은 공간 즉 장소의 힘을 “숨겨진 힘이며, 기억을 키우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주님과 함께 거니는 삶을 기억하는 힘은 공간의 여지와 마음의 여백에서 피어남을 재삼 확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내 자신이 기도한다고 하지만 늘 주님이 먼저 그런 자리를 허락해 주시고, 기다리시고,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했다.”(루카 22,32)는 말씀처럼 주님의 기도 속에서 평화의 발걸음을 새해에도 걸어보려 합니다. 혼자 그리고 함께 가는 아름다운 길에서 두 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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