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45

마산교구 전사001.jpg

마산교구 전사前史 6

 

명례본당(1)
명례공소는 삼랑진본당에 속해 있었다. 1996년 수산본당이 신설되자 공소 역할을 접고 본당 관할구역이 되었다. 이후 성지로 조성되었고 2011년 이제민 신부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수산본당 주소는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다. 마산교구로선 유일하게 밀양 땅에 있는 본당이다.


하남下南은 조선시대에 붙여진 이름이고 예전엔 지역 전체를 수산守山이라 했다. 수산이 하남보다 오래된 지명이다. 원래는 수산현守山縣으로 현감이 거주하는 큰 고을이었다. 고려 초 밀양에 병합되면서 현은 사라지고 인구도 줄었다. 조선이 되자 밀양 남쪽이란 의미로 하남면下南面이 되었고 현청縣廳이 있던 곳을 수산리라 했다.


명례는 하남읍에 속하며 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밀양에선 제일 남쪽이며 강을 건너면 김해군 이북면二北面 가동佳洞과 바로 연결된다. 현재의 김해시 한림면翰林面 가동리佳洞里다. 이런 이유로 명례엔 예부터 나루터가 있었고 명례 나루라 불렀다.


밀양에서 김해로 가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낯선 사람들이 늘 모여들었기에 새로운 것에 대한 반감도 적었다. 피난 교우들이 정착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곳은 일찍부터 교우들이 숨어들었고 그들에 의해 인근 지역으로 전교가 이루어졌다.


명례에 처음 신자들이 나타난 것은 정해박해(1827년) 이후로 보고 있다. 박해 후폭풍을 피해 명례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김범우 후손에 의해 입교한 인근 교우들로 알려져 있다. 김범우는 밀양군 단장면 법귀리(現 안법리)로 유배 왔다가 일찍 선종하고 아들 김인구와 손자 김동엽이 정착하면서 열심히 전교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던 것이다. 영남지방 첫 공소로 알려진 삼량진 웁실(우곡)공소와 용전, 승진공소는 이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공소다.


정해박해 여파가 심해지자 밀양 교우들은 동쪽 양산지역으로 피신해 전교했고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밀양군 부복면, 무안면, 초동면으로 숨어들었고 창녕군 부곡면, 수다리에도 전교한 흔적이 있다. 


남쪽으로 피신한 교우들은 명례에 터전을 마련했다. 그들은 김해군 이북면 술미와 노루목(한림)에 전교했고 생림면 봉림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편 경북에서 내려온 교우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들 역시 정해박해를 피해왔던 것이다. 아무튼 이들이 마산교구 동부지역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교우들이다.


이 지역 교우촌은 병인박해 속에서도 살아남는다. 순교자도 여럿 있다. 아마도 무명 순교자는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그분들의 정성으로 이곳 명례에 본당이 서게 된다. 1897년 6월이었다. 명례본당 배경에는 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 신부가 있다.


강 신부는 다섯 번째 한국인 사제로 충남 홍산(現 부여군 홍산면) 출신이다. 첫 사제 김대건 신부는 1845년. 두 번째 최양업 신부는 1849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세 번째 사제서품은 1896년 4월 26일 서울 약현성당(現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있었다. 용산 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 세분이다. 이들은 뮈텔 주교 주례로 서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성삼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서 얻은 풍토병을 극복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품직후 부산본당으로 갔다가 이듬해 휴양을 겸한 명례본당 신부로 왔던 것이다. 강 신부는 명례본당에서 7년간 사목하다 1903년 9월 선종했다. 37살 아까운 나이였다. 무덤은 부산 용호동 성직자 묘지에 있다. 이후 명례본당은 공소로 환원되었고 마산 완월동본당에 속했다가 삼랑진본당에 속하기도 했다. 현재는 수산본당에 속해 있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7

 

명례본당(2)
강성삼 신부는 명례에서 7년간 사목하다 1903년 37살로 선종하고 이후 명례본당은 다시 공소로 환원되었다고 했다. 왜 공소로 환원되었을까? 명례보다는 인근 삼랑진과 진영 쪽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명례는 낙동강을 이용하는 수상교통의 중심지였다. 밀양에서 김해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1900년대로 들어서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경부선京釜線 철도공사로 상권과 교통이 삼랑진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05년 마산선馬山線 철도가 개통되자 삼랑진은 교통의 요충지로 북적거리게 된다. 당시 삼랑진에는 일본인 상인들과 농장주들이 수백 명 살고 있었고 이들의 보호를 위해 파출소와 헌병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편 마산선이 개통되자 진영에도 역驛이 생긴다. 조용하던 마을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농산물 집하장도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명례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떠나갔고 신자 수 역시 줄었다. 그러니 다시 본당을 세우려면 삼랑진이나 진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명례 교우들은 본당으로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피난 교우들의 염원이 담긴 본당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밀양지역에도 본당이 있어야 함을 역설하며 줄기차게 신부 영입 운동을 펼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다. 재건 명례본당이 신설된 것이다.


설립일은 1926년 5월 10일(경향잡지 제20권 참조). 공소로 환원되고 13년 지난 뒤였다. 특히 이날은 진주본당(現 옥봉동성당)과 거제 옥포본당 설립일과 같다. 1926년은 대구교구에서 처음으로 11명의 새 사제가 탄생되는 감격적인 해였다. 그리하여 6개의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했는데 명례가 여기에 들었던 것이다.


당시 모든 공소의 간절한 소원은 신부님을 모시고 본당으로 승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사이동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고 본당 승격 가능성이 있는 공소 회장들은 아예 주교관 근처에서 밤을 지새우며 소식을 기다리곤 하였다.


신설 여섯 본당은 밀양 명례와 경주, 전북의 부안과 장수, 거제 옥포와 진주본당이었다. 공소들이 밀집된 지역에 신설 본당이 선임된 것을 알 수 있다. 명례본당 신부는 권영조(權永兆 마르코) 새 신부였다. 본당 승격이 이루어진 공소 회장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고 발표에서 빠진 공소는 내년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권영조 신부는 1926년 5월 10일 발령받고 5월 30일 부임했다. 열정으로 선교하면서 낡은 공소건물 대신 새로운 성전 건립을 구상한다. 기성회를 조직해 성당건축을 시작했고 마침내 기와로 된 성당을 지었다. 낙성식은 1928년 8월 30일 있었다. 이후 권 신부는 미래 전망은 명례보다 삼랑진이 낫다는 생각을 갖는다. 갈수록 명례엔 인구가 줄고 삼랑진은 늘어났기 때문이다.  


1929년이 되자 권 신부는 본당 이전을 결정짓는다. 삼랑진 우곡리(牛谷里)에 대지 1500평을 매입하고 임시성당과 사제관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명례 신자들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30년 1월 명례본당은 삼랑진으로 이전되고 권 신부는 삼랑진 초대 신부가 되었다.


권영조 신부는 김천 출신으로 1901년생이다. 명례본당 부임 때 25살 젊은 나이였다. 20대 젊은 나이였기에 결정도 빨랐던 것이다. 아무튼 명례본당은 본당 신부로 두 분을 모셨는데 권 신부님은 20대였고 강 신부님은 30대 초반이였다. 모두 사제생활 첫발을 내딛는 분들이었다.

 

조선대목구


  1. 마산교구 전사前史 14-15

    Date2023.05.18 Views34 file
    Read More
  2. 마산교구 전사前史 13

    Date2023.05.04 Views37
    Read More
  3. 마산교구 전사前史 12

    Date2023.04.20 Views37
    Read More
  4. 마산교구 전사前史 11

    Date2023.03.30 Views48
    Read More
  5. 마산교구 전사前史 재수록 9-10

    Date2023.03.16 Views37
    Read More
  6. 마산교구 전사前史 재수록 8

    Date2023.03.03 Views40
    Read More
  7. 마산교구 전사前史 재수록 6-7

    Date2023.02.16 Views45
    Read More
  8. 마산교구 전사前史 재수록 5

    Date2023.02.02 Views50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