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1.05.13 15:16

지렁이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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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홍연수 마리아 수필가

중학생 때 일이다. 가랑비 내리던 어느 날 흩날리는 빗방울에 조금씩 젖어드니 계단 위로 작은 지렁이 한 마리가 천천히 기어 나오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보드랍게 보이는 작고 귀여운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 가만히 다가가 지렁이 등에 손가락을 살짝 대 보았다. 생각보단 부드럽고 매끈하게 움직여 손끝으로 잔잔한 감동이 진하게 전해졌다.


모든 생명은 늘 새롭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어도 자연 속에 머물면 금방 생기를 되찾곤 했다. 주일 신자였던 난 사회생활로 지치고 힘들 땐 고요한 숲속에 자리한 피정 집을 자주 찾아가 쉬며 내 영혼도 돌아보고 홀로 머무는 시간을 가지면 많은 것이 정리되고 좋았다. 그러나 점점 더 지치고 팍팍해지는 삶 속에서 그런 여유도 잃어 가니 모든 게 무덤덤해져 버려 나는 한 수녀원으로 ‘대침묵피정’을 갔었다. 조용히 함께 기도하고 면담도 하며 많은 일들을 돌아보고 묵상도 하니 지친 마음은 한결 나아져 마지막 날엔 가벼운 마음으로 운동장을 거닐었다. 그때 마침 흙 사이에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말라 죽어 납작한 게 보였다. 문뜩 전에 보았던 지렁이 생각에 가만히 들여다보다 메마른 거죽에 손가락을 살짝 대 보았다. 순간 내 안으로 훅 밀려드는 딱딱한 느낌은 부드럽고 연약함도 다 사라진 굳어가는 내 마음 같았다. 죽은 지렁이 한 마리가 순간 날 확 일깨웠다. 어느새 내가 이렇게 변했구나 싶었다. 그래서 오후 시간 다시 운동장으로 가서 죽은 지렁이를 찾아보았으나 그 자리엔 없어 두리번거리다 까맣게 모여든 개미떼들 쪽으로 가 보니 그 죽은 지렁이를 열심히 어디론가 옮기고 있었다. 난 한참을 서서 그 모습을 보며 심란해졌다. 내 메마름 이후 갈 자리는 어딜까? 나도 정말 모르겠구나 싶었다.


어느새 많은 것을 먼저 생각하고 이해될 때 믿는 지식인으로 길들여져 가던 난 신앙생활도 이성을 앞세우고 있구나 싶다. 생기 없이 기쁨과 찬미도 모른 채 영적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던 내게 영적 기쁨이 필요했다. 이후 많은 것을 돌아보며 정리하고 다시 굳게 결심하고 부단히 노력했다. 돌아보니 그 지렁이는 내 영혼을 살린 생명의 신비고 은총이 됐다.


나는 잘 살고 싶어 성체 앞에 가까이 머문다. 정말 행복하게 잘 사는 건 어떤 모습인지 묻고 또 물으며 답을 구한다. 그리고 깊이 성찰하고 통회하며 자주 고해성사를 드리려 한다. 부족하기만 한 저에게 늘 따뜻한 위로와 사랑 주시는 당신 계심에 이젠 크게 외칠 수 있다.


“사랑합니다. 주님! 전 행복합니다. 감사드립니다.”

 

210516 3면 백그라운드(홈피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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