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1.04.15 15:17

같이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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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문옥영 테오도라 시인

한쪽 손이 자꾸만 떨리기 시작했다. 병원을 찾아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병세가 한참 진행되고 나서야 파킨슨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이름도 낯선 불치병에 걸리다니……. 의사에게 병을 고칠 수 없다면 손만이라도 떨리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처방약을 먹으니 손은 덜 떨렸으나 부작용이 따랐다. 마음이 침체되고 우울감이 심했다.


흐리고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어느 날이었다. 비를 맞으며 걷자니 이 세상에서 그만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잠깐이었지만 죄스럽고 한심한 내 모습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비록 부자유스럽기는 하지만 한 손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어쩌면 이를 통해 주님께서 내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게 아닐까? 움켜쥐지 말고 베풀라는 말씀? 언제라도 손을 털고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하라는 말씀? 아니면 주님께서 내게 듣고 싶으신 말이 있는 걸까? 


분명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 무언가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을 게다. 
내 생애 마지막을 주님께 의탁하고 오롯이 봉헌하리라. 그동안 교회를 떠나 세상에서 하던 일들을 정리하고, 레지오를 시작했다. 레지오 활동을 하다 보니 병들고 힘없고 가난하지만, 한없이 착하고 여린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는 절실하게 와닿지 않았던 아프고 가여운 사람들이 마음에 다가왔다. 


내게 닥쳐온 불행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 죽을 때까지 같이 가는 수밖에 없다. 
마음을 열고 긍정적인 자세로 바라보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내 손길이 한번 지나면 구석에 웅크렸던 먼지들이 화르르 깨어났다. 부드럽게 쓸어내린 손길 따라 강아지 흰 목덜미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내 손끝에서 살림살이는 반짝반짝 빛나고, 화초들은 싱싱하게 자랐다. 내가 손을 흔들어 인사할 때 세상은 햇살처럼 환하게 웃어 주었다.


떨리는 내 손이 조심조심 지나는 이 길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지!
마침 트롯 열풍을 타고 들려온 ‘연리지’의 노랫말이 가슴 저리게 와 닿았다. 어쩌면 주님께서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인지도 모르겠다.


“살아도 같이 살아요. 죽어도 같이 죽어요.”  “끝내 이렇게 만나게 될 걸 왜 우리 먼 길 돌았나요.”

 

210418 3면 백그라운드(홈피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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