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2.08.25 11:17

흔적

조회 수 51
Extra Form
저자 이규준 바오로 시인

마그마가 분출하듯 대지가 들썩거렸다. 오뉴월 지독한 가뭄에 단비를 만난 농부처럼 언론은 춤을 추었다. 속보를 긴급 타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떨렸으며, 신문 지면을 애써 메워 나가던 “카더라” 기사는 특종으로 대체되었다. 목구멍에 반쯤 걸린 해묵은 가시를 뽑아내는 회오리 같은 쾌거였다. 오래전 부녀자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희대의 사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드디어 밝혀진 것이다. 늘 사람들 가슴 한구석에 생채기로 남아 있던 옹이가 뽑혔다. 사건 해결의 실마리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결코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티끌보다도 작은 흔적이었다. 세월의 풍화에도 변질되지 않고 남아 있던 DNA가 첨단 과학으로 촘촘하게 짜인 그물망에 덜컹 걸려 버린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흔적을 남긴다. 흔적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흔적을 남긴 또 다른 흔적을 먹이사슬처럼 끝없이 추적하다 보면 최종의 하느님과 대면하게 된다. 이른 봄 꽃대를 지탱하고 있는 노루귀의 뿌리는 흙을 붙잡고 있다. 흙의 고향은 산기슭에 우뚝 솟은 투박한 바위임에 틀림이 없다. 영겁의 세월 동안, 잠시 쉬었다 가는 노루와 토끼의 무게에 닳고 비바람에 갈라지고 쪼개어져 강가의 자갈이 되고, 자갈은 오가는 물결에 부딪쳐 고운 흙이 되었다. 


세상은 흔적을 담는 그릇이다. 흔적이 하나둘 층층이 쌓이면 지층이 되고, 지층은 삶의 궤적이 되고 역사가 된다. 지울 수 없는 흔적이 있으며, 지워서는 안 될 흔적도 있다. 의사로서 보장된 안락한 삶을 버리고 사제가 되어 아프리카 수단으로 떠난 고 이태석 신부, 자신을 온전히 불태우면서 어둠을 밝히는 촛불로 살았다. 이승에서 타오르던 촛불은 꺼졌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하늘의 별로 떠올라 검은 대륙을 훤히 밝히는 등불로 남아 있다.


인생의 반환점을 지났다. 청운의 꿈을 만들기보다는 여물게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잠시, 두 어깨 위의 짐을 내려놓고 지난날을 되새김질해 본다. 각본 없는 생존의 전장에서 뜬구름을 잡기 위해 크고 작은 많은 전투를 치렀다. 돌이켜보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투였다, 결국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었던 셈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의 행간의 의미가 장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읽힌다. 잎 하나 없는 겨울나무를 가슴으로 쳐다본다. 낙엽은 썩어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이듬해 움을 틔우는 양분이 됨으로써 또 다른 흔적이 된다. 흔적은 부단히 새로운 흔적을 만들어 나간다. 결승선을 향해 나아가는 나의 발자국도 남에게 보약은 아니더라도 독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워야 할 흔적, 애써 오욕의 흔적을 지운 또 다른 흔적이 남아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220828 영혼의뜨락 백그라운드 이미지(홈피용).jpg


  1. 시련의 때를 만나면

    Date2022.10.13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3 file
    Read More
  2. 줄탁동시啐琢同時

    Date2022.10.05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48 file
    Read More
  3. 공손과 배려가 마중물이 되어 작지만 옹골찬 경화동성당

    Date2022.10.05 Category본당순례 Views627 file
    Read More
  4. 두 가지 걱정

    Date2022.09.29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62 file
    Read More
  5. 여행자

    Date2022.09.22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6 file
    Read More
  6. 인간의 최선, 신의 최선-이승우의 『허기와 탐식』

    Date2022.09.15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49 file
    Read More
  7. 너무 사적私的인 기도

    Date2022.09.15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5 file
    Read More
  8. 순교자 성월에는 더욱 뜨겁게, 한마음으로 양곡성당

    Date2022.09.08 Category본당순례 Views910 file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 38 Next
/ 38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