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2.09.22 10:38

여행자

조회 수 36
Extra Form
저자 이선향 안젤라 아동문학가

“언니야, 코로나 이제 괜찮으니 올해는 여행 가자. 이러다가 얼굴도 못 보고 살겠다.”


우리 세 자매는 2019년 독도 여행 이후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대구, 부산, 진주 먼 곳도 아닌데 자꾸만 멀게만 느끼고 있었다. 어렵사리 시간을 맞추어 2박 3일 통영, 거제 바닷가로 가서 그동안 못한 회포를 풀 참이었다.
늘 바빴던 일상을 벗어나 자유로운 여행자가 되고 싶은 내 마음은 설렜고 마치 초등학교 시절 소풍 가는 아이 같았다. 


동생의 승용차를 타고 여러 곳을 다니다 숙소에 갔을 때 일흔두 살 언니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불과 3년 전에 울릉도, 독도를 다녀왔고 동생들 동영상까지 잘 찍어주던 언니가 이런 하루의 여행으로 피로를 느끼고 아팠기 때문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행의 설렘은 걱정으로 바뀌고 급히 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고 주사와 약 처방을 받았다.


치료를 받으니 안심이 되긴 했지만, 언니 건강이 걱정되어 우리가 계획한 여행을 할 수가 없었다. 오전 내내 방에서 이야기 나누고 바다 바라보면서 쉬는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다를 떨면서 함께 있다 보니 언니의 늙은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젊은이 부럽지 않던 체력과 깡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생의 힘겨운 삶도, 언니의 늙어가는 모습도, 나의 채워지지 않는 갈증의 삶도, 그동안 서운했던 일들도 서로 마음을 열고 들어가니 나약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부질없는 일들에 삶을 내어주었는지 지나간 시간이 참 아깝게 느껴졌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더니 조용히 서로를 연결해 주었다. 그리고 쌓였던 생각의 찌꺼기들이 씻겨 나가고 있었다.


우리 세 자매는 지금 여행을 하고 있다. 지구라는 참 아름다운 별에 무상으로 여행 왔다가 때로는 힘든 공부도 하고 가끔은 즐거움과 기쁨을 선물 받으면서 잠시 머물고 있다. 돌아가는 시간까지 이 멋진 여행을 위해 주어지는 인생 공부가 있어서 때로는 도전하고 때로는 긴장하면서 삶을 나의 것으로 가꾸도록 해 주시는 분께 진짜 고마워해야 하지 않는가? 


잔잔한 바다 위에 내려앉은 구름과 줄지어 있는 하얀 양식장 부표들! 누군가는 우리가 보지 않는 어느 시간대, 어느 곳에서, 힘들게 가꾼 자신의 일부분을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 내어주고 있었다.


“안젤라야, 너는 너무도 많은 일에 마음을 쓰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란다.”


껍데기만 신자가 되어 몸은 성당을 다니지만, 정녕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못하는 내 영혼이 이 쉼의 시간을 통해 진정한 여행자가 될 수 있기를, 하느님 사랑을 간직할 수 있기를.

 

220925 영혼의뜨락 백그라운드(홈피용).jpg


  1. 시련의 때를 만나면

    Date2022.10.13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3 file
    Read More
  2. 줄탁동시啐琢同時

    Date2022.10.05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48 file
    Read More
  3. 공손과 배려가 마중물이 되어 작지만 옹골찬 경화동성당

    Date2022.10.05 Category본당순례 Views627 file
    Read More
  4. 두 가지 걱정

    Date2022.09.29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62 file
    Read More
  5. 여행자

    Date2022.09.22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6 file
    Read More
  6. 인간의 최선, 신의 최선-이승우의 『허기와 탐식』

    Date2022.09.15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49 file
    Read More
  7. 너무 사적私的인 기도

    Date2022.09.15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5 file
    Read More
  8. 순교자 성월에는 더욱 뜨겁게, 한마음으로 양곡성당

    Date2022.09.08 Category본당순례 Views910 file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 38 Next
/ 38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