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2.09.01 11:55

터널을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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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유희선 가타리나 시인

220904 영혼의뜨락 상단 이미지(홈피용).jpg

 

예술인들을 위한 신중년 사업에 참여하면서 출근과 퇴근이 생겼다. 전업주부로만 살던 내게 처음 직장이 생긴 것도, 출근길과 퇴근길이 생긴 것도 신선했다. 사회에서 일컫는 ‘신중년’ 그러니까 만 50세에서 70세 사이의 카테고리 안에 속한다는 것도 새삼 흥미로웠다. 도시문화 디자인이라는 타이틀로 참여한 기관은 진해 웅동 지역에 있는 문학관이다. 인근의 산업단지와 거대 물류센터 개발로 조용하던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부산 신항으로 가는 도로 위의 거대 트레일러의 행렬은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버린 지역 특성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출근길을 단축하는 수혜를 누린다. 처음에는 여러 루트를 시도했었지만, 지금의 노선을 정한 다음부터는 같은 길로 다닌다. 바로 진해 터널을 통과하는 길이다. 마침 그 터널은 정식 개통이 되기 전이어서 구간 단속 80㎞는 눈속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량이 뜸해 대략 7㎞ 구간을 혼자 달릴 때도 있었다. 속도를 의식하지 않고 악셀레이터를 밟아보는 체험은 평생 처음이었다. 


속도는 몰입과 희열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 맛을 처음 알게 된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도로를 만들고 점점 더 긴 터널을 만들고, 성능 좋은 자동차를 만들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법규를 만들고 온통 카메라로 통제한다. 그러니까 사실은, 개개인보다 세상이 더욱더 속도를 갈망하고 갈구한다. 속도를 숭상하는 세상에서 범칙금을 피해 요령껏 운전하도록 길들이는 일상의 모습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소소한 위반은 전혀 가책받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심리는 무엇일까? 더 나아가 들키지 않는 수많은 법규 위반들은 얼마나 많은 것일까? 비록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느님과 양심을 거역하는 개개인의 비밀스런 죄는 또한 얼마나 많을까? 발각되지 않고, 대형사고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은 괜찮은 것일까? 세계가, 한 사회가 갈망하는 속도와 전형화된 성공의 모습은 획일화되어간다. 뒤처지기 시작하면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위험한 폭주를 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맛의 쾌감을 느껴봤을지도 모른다. 또는 실행해 보지 못한 잠재력의 최고치를 시험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길을 만들고 터널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가속에 무감각해지는 지점을, 끝내 사고 다발 지점이 발생한다는 것을 꿰뚫고 있다. 터널은 그 상황이 더욱 명징하게 압축된 곳이다. 진입 후 어느 지점부터는 온갖 종류의 형형색색 네온이 총동원되어 번쩍거린다. 그것도 모자라 거칠고 다급하게 사이렌이 울린다. 그토록 지나치게 친절한 모습이나, 꼼짝없는 범칙금 제도밖에는 인간을 다루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갑갑하다. 복잡하게 얽힌 세상에서 복잡한 감정을 가지며 살아가는 개개인들이 법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을 찾는 이유일 것만 같다.


이제 더는 터널 속에서 예전에 맛보았던 속도로 달릴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구간속도에 집중하느라 뜻밖의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영원 같은 묘한 감정을 느껴보았다. 그리고 종교의 한 단면을 얼핏 본 것 같기도 하다. 가깝게 느끼는 계명과 멀게만 느껴지는 구원이라는 구간을 통과하는 긴 여정의 의미를 생각한다. 터널 속을 달리듯 시간은 오로지 한 방향이다. 당근과 채찍 그 너머 터널 끝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완성이란 어떤 것일까? 성숙한 신앙생활에 대해, 그 모든 것이 빛과 
자유임을 알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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