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시니까.”
사실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부르짖었던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 안에 해결되지 않는
왜곡된 분노의 표출임을
예수님께서 보셨기에,
그들을 미워할 수가 없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 구원 사건의 절정이 오늘부터 시작하는 한 주간에 다 일어나고 있기에 거룩한 주간이라고 합니다. 이 거룩한 한 주간 동안에 인간 구원사건의 절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오늘 수난 복음을 통해 들려주는데, 그 여러 사건 중에 제 마음을 참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대목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께 놀림을 하는 그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한 때는 예수님 당신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죽음을 요구하고 모욕을 하는, 그들을 위해 어떻게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하시는지 참으로 이해하고 받아드리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예수님이시니까.” 라고 쉽게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믿음이고 대답이라 여겨집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을 뭉뚱그려 단지 군중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그냥 뭉뚱그린 군중으로 보지 않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따로 떼어놓고서 본 것입니다. 만일 군중으로만 보았다면 그냥 그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지만, 한 개인으로 다들 따로 떼놓고 보면 그들 각자 지니고 있는 그 나름의 문제와 이유를 볼 수있게 되고 이해가 됩니다.
로마식민지시대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좌절감, 삶의 힘겨움에서 오는 팍팍함, 가질 것이 없는 것에 오는 허탈감, 살아남기 위해 아부할 수밖에 없는 비굴함 등으로 비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다 보셨습니다. 사실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부르짖었던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 안에 해결되지 않는 왜곡된 분노의 표출임을 예수님께서 보셨기에, 그들을 미워할 수가 없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절대 그냥 인간들로 뭉뚱그려 보지 않으십니다. 고유한 한 개인인 우리 자신을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대하시는 그런 마음을 이 성주간에 알아들었으면 합니다. 우리 역시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고유하고 유일한 사람으로서, 이해와 사랑으로 소중하게 여기면서 다가가 가 보고자 노력해보는, 그런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