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2.10.05 16:05

줄탁동시啐琢同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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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하진형 다니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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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啐琢同時는 참으로 아름답고 깊은 말이다. 병아리가 알에서 태어나기 위해서는 때를 맞추어 어미 닭이 밖에서 쪼고 병아리는 안에서 쪼며 서로 도와야 순조롭게 탄생된다. 이처럼 무엇이든 제대로 이루려면 혼자 하는 것보다 힘을 모으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런데 식물도 줄탁동시를 한다. 제대로 된 단감을 수확하기 위하여 거름도 주고 감나무 꽃도 솎아내기도 하지만 나무 스스로도 조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가지에 감이 많이 열리면 크기를 줄인다. 참으로 기특하고 신비롭다. 그러다가 사람이 받침대를 받쳐주면 큰 감으로 키운다 한다. 사람과 식물의 줄탁동시다. 그런가 하면 호박넝쿨도 제초작업을 하면서 다치지 않게 한곳으로 치워 놓으면 어느 순간 작은 알맹이를 떨구고는 더욱 큰 호박을 잉태하여 키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식물의 줄탁동시를 보면서 그것이 동물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한 나는 얼마나 무지했던가? 나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세상천지가 매 순간 줄탁동시를 하며 흘러가고 있다. 동물과 식물은 물론 무생물과도 한다. 아무리 거대하고 튼튼한 성곽일지라도 큰 바윗덩어리로만 지어진 것은 없다. 틈틈이 작은 돌이 받쳐 주어야 튼튼하고 오래간다. 그것은 자연의 줄탁동시이고 이치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들은 자연에 기대어 커가면서 보이지 않는 세상의 섭리에 순응한다.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 다 있는 것을 사람들만 모른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삶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줄탁동시다. 사회적 동물인 까닭에 혼자 독불장군으로 살 수 없음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잘나서 혼자도 잘 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만 그야말로 ‘턱도 없는’ 일이다. 서로 밀고 당겨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쁘게 피어난 꽃을 보거나, 아름다운 새소리를 듣거나 좋은 일이 생길 때에는 이웃들과 나누며 같이하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있으려니 맑고 청아하여 신비스럽기까지 한 새소리가 하늘로 퍼져나간다. 새소리에 색깔이 있다면 가을을 기다리는 노란 구절초의 색깔일 수도 있고 봄을 기다리는 보라색 제비꽃을 닮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순간도 곳곳에서 소리 없는 줄탁동시가 천지에서 행해지고 있다. 어머니의 새벽녘 기도에 하늘이 응답해 오는 것도 줄탁동시이고, 봄에 흘린 땀이 가을에 열매로 돌아오는 것도 마찬가지며, 걸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측은지심도 그렇다. 오늘도 줄탁동시를 생각하면서 호박구덩이를 판다. 널찍하고 깊게 파서 소금기 없는 음식쓰레기며 상한 과일 등을 묻고 흙으로 덮어준다. 그리고 내년 봄에 호박씨를 뿌릴 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누구나 크고 작은 고개를 넘는데 그 고비마다 나도 모르는 이웃들의 도움이 얼마나 많았고, 나는 또 그 많은 고마움을 무지無知하게 지나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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