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58
Extra Form
저자 김은정 엘리사벳 교수/경남대

성직자의 삶은 어떤 것일까. 항상 성령으로 충만한 기쁨의 연속일까, 아니면 평범한 인간의 고통이나 불안함도 있는 것일까. 김훈의 『저만치 혼자서』는 이 이야기를 한다. 


무대는 호스피스 수녀원인 ‘도라지 수녀원’이다. 정식 명칭은 성녀 마가레트 수녀원이지만 그냥 그렇게 별칭으로 부른다. 도라지꽃은 흰색이든 보라색이든 테두리에 희미한 검은색을 지니고 있다. 다양한 빛깔에서 검은빛으로 흘러가듯이 말년의 수녀들은 이 수녀원에서 죽음으로 건너갈 준비를 한다.


손 안나 수녀는 여든 살이 되어 들어왔는데 이미 정신이 혼미한 상태이다. 그녀는 종신서원 이후에 기지촌 여자들의 삶을 보살피는 일을 하여 왔다. 김 루시아 수녀는 그녀의 룸메이트이다. 그녀 또한 젊어서부터 남해의 먼 섬에 격리된 나환자들을 돌보며 살아왔다. 깔끔한 성격이지만 어느덧 늙고 병들어 대소변을 지리고는 한다.

 
오래전 마가레트 수녀는 은둔의 삶을 버리고 세상 속에서 부상병들과 나환자들, 전쟁고아들을 돌보았었다. 그들이 죽을 때마다 끝까지 동행할 수 없는 아픔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는 했다. 


두 수녀도 그렇게 연약한 인간의 존재에 동정심을 가졌고, 세상의 불쌍한 이들을 돌보았으며, 평생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죽음의 시간 앞에서 불안해하는 한 인간이요, 그래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김 루시아 수녀와 손 안나 수녀는 둘 다 불면증이 깊었다. 몸이 살아서 병을 감당해 내고 있었다. 병이라기보다는 시간이었다. 새벽까지 의식은 물러가지 않았고, 그 속으로 어둠이 번져서 잠과 깸은 구분되지 않았다. [중략] 새들은 별이 가득한 하늘을 헤집고 끼룩끼룩 울었다. 수녀들은 잠들지 못하고 오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음의 꼬리가 잦아들고 오리떼가 다시 잠든 후에도 수녀들은 옆 침대에 누운 사람이 잠들지 않았다는 걸 서로 알면서 뒤척거렸다.


충만한 성령과 인간으로서의 고뇌, 이것이 성직자들의 삶이 아닐까. 그 삶이 거룩한 것은 성령이 충만해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외로움과 고통을 견디며 스스로 희생과 봉사의 길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병든 몸에서 일어나 오히려 타인을 향하기에 그 삶이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저만치 혼자서 핀 성직자의 삶은 우리 곁에서 먼 듯 가깝다. 손 안나 수녀가 수녀복 대신 평상복을 입고 환자를 간호하고, 혼미함 속에서 기지촌 여자들의 무덤과 수녀들의 무덤을 구별하지 못하듯이, 성직자의 삶은 신성한 저곳에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힘들고 지친 이곳과 뒤섞여 있다. 성령과 세상의 고통이 함께하는 삶이다.


입춘 무렵이면 수녀원 주변의 늪지에서 가창오리떼가 먼 바이칼호수로 떠난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새들, 그리고 수녀들의 안녕을 빌어 본다.


늙은 수녀들이 입춘의 양지쪽에 앉아서 돌아가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올 때의 무리와 갈 때의 무리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새들이 무리를 짓는 인연은 무엇인가. 새들도 친인척이 있고 벗이 있고 이웃이 있는지, 금년에 온 새들은 작년에 왔던 그 새들인지, 바이칼호수는 얼마나 먼지를 늙은 수녀들은 서로에게 물어보았다. 새들이 하늘에 스며서 가물거릴 때 수녀들은 희미한 새떼를 향해 성호를 그었다.

 

221016 8면문학과신앙 백그라운드(홈피용).jpg


  1. 도마야, 나는 아직 너를 도마라고 부른다-김훈의 『하얼빈』

    Date2022.11.17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53 file
    Read More
  2. 어디로 가야 하나

    Date2022.11.17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49 file
    Read More
  3. 의인의 기도

    Date2022.11.09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98 file
    Read More
  4. 예수성심의 사랑 속에 걷고 뛰었던 60년 사천성당

    Date2022.11.09 Category본당순례 Views680 file
    Read More
  5. 거듭된 그림자의 음습에

    Date2022.11.03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2 file
    Read More
  6. 어머님께 청하오니

    Date2022.10.27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126 file
    Read More
  7. 전교의 향기

    Date2022.10.20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187 file
    Read More
  8. 저만치 혼자서 피는 삶-김훈 『저만치 혼자서』

    Date2022.10.13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58 file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38 Next
/ 38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