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2.11.17 13:25

어디로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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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정자 이사벨라 수필가

혼자서 하염없이 걷다 보면 생각은 백지가 된다. 그때 어떤 것이 훅 들어오면 사정없이 거기에 빠져버린다. 그것이 진리일 수도 있고 풍광일 수 있고 상념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사람과의 관계에 골똘했다가 한 걸음 나아가면 사물로 이동하고 거기서 점프하면 존재의 본질로 들어선다. 나는 왜 나이고 너는 왜 너이며 엄마는 왜 엄마이고 당신은 왜 당신이냐이다. 그 각각의 개성과 성질을 나와 연결해 보면 벅차고 외롭고 아프다. 


나를 있게 한 엄마와 성장을 도와준 아버지와 부모님을 있게 해준 할머니 할아버지와 나도 어느새 엄마가 돼 있는 이것들이 한없이 신비롭고 감사하고 벅차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서글프고 외로웠다. 생각해 보면 눈만 뜨면 이별이다. 이 발자국도 곧장 이별, 저 하늘의 구름도 곧 이별이다. 몸과 늘 붙어 다니던 이 옷도 해지거나 변형으로 이별을 하고 오늘은 내일을 내주면서 이별할 것이다. 지금 시각이 10시 50분, 이 숫자도 눈 깜빡할 새 이별이고 보고 싶었던 너도 점점 잊히면서 이별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차오른 새 살들, 어쩌면 이별을 통해 삶의 동력을 얻는지도 모른다. 잔인하다. 이 분명한 정념 앞에서 왜 나는 한없이 무너지며 허약했던가. 잠시 돌덩이에 앉아 걸음을 멈추었다. 보려고 하지 않아도 온통 눈동자를 차지해버리는 저 하늘, 구름이 만상만큼이나 다양하고 현란하다. 은근히 감미롭다. 탐색과 사색이 주는 선물인가, 일어나 배낭을 추스르고 걷는다. 생각을 하다 보면 언제나 두 갈래의 길이 나온다. 환상과 실체 전진과 포기 희망과 좌절 양보와 선점 선행과 게으름 정직과 핑계 미움과 이해이다. 어떤 방향이든 한쪽은 고달프고 한쪽은 편하다. 굳이 자신을 할퀴며 골똘할 필요가 있느냐는 자책도 지나고 보면 그분이 끌어준 방향일 수가 있고 반대로 놓아버린 때도 있다. 무엇이 이것이었고 무엇이 저것이었는지는 모른다. 시간이 지나도 모를 수 있고 영영 모를 수도 있다. 여기서 나는 주저앉아버렸다. 칠흑 같은 어둠이 어디 한밤중만이던가, 멀건 대낮에 훤한 햇덩어리를 이고도 나는 캄캄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그때 환청이 울렸다. “딸아, 너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마라. 그저 내가 마련해 놓은 이 풀과 나무와 꽃과 바람과 바위를 빠뜨리지 말고 보고 느끼거라. 거기에 내가 있겠다.” 하도 지친 나머지 헛것이 들렸을까, 아니면 망상일까, 하지만 울림이 너무나 컸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한기가 스미더니 이내 체온보다 높은 온기로 혈관이 부풀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하나. 이 변동은 또 무엇인가. 나는 이 느낌을 붙들었다. 하느님은 나를 죄인처럼 다루지 않았고 꾸짖지도 않았으며 조심스레 지켜보고 계셨다. 이것이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여기’이고 돌아가야 할 곳도 ‘여기’이며 나아갈 곳도 ‘여기’이다. 여기에 모든 에너지가 몰려 있고 내 생애 가장 충만한 곳도 여기이다. 나는 ‘여기’를 선물로 받았다. 불현듯 어떤 열망이 솟구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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