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2.12.08 14:15

요때 죽으면 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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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정권 시몬 수필가

저물어 가는 계절이 아쉬워 가을 앓이를 하는가 싶었더니 어느새 겨울이 깊어간다. 1년 중 가장 어둡고 긴 밤인 동지를 불과 열흘 남짓 남겨 두었으니 올해도 거의 막바지다. 지난날 한때는 이때쯤이면 혼기 꽉 찬 처녀, 총각들이 해 넘기지 않으려고 결혼러시를 이룬 때도 있었지. 라디오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고 상가들은 크리스마스트리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었다. 애꿎은 우체부는 밀려드는 성탄 카드와 연하장 배달로 몸살을 앓았을 터이고 그리스도교가 국교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연말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통금이 일시 해제되고 분위기 한껏 고조되었었다. 그것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카드와 연하장이 사라지고 전자메일로 대체 되는가 싶더니 요즈음은 그것마저도 뜸하니 추억하나가 송두리째 사라진 것 같아 아쉽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다. 진행자는 춘천의 박사마을을 방문하러 가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79세 동갑내기 노부부를 선정하여 퀴즈를 내면서 대화를 나눈다. 자칭 술 박사라고 자기소개를 한 할아버지는 건강하게 보이며 말씀도 잘하였는데 연신 술 잘 먹는다는 자랑을 힘주어 강조하며 뽐내었다. 이에 진행자 유재석은 “100세 시대인데 술 좀 끊고 건강하게 사셔야지요.”라고 하였더니 할아버지가 “뭘, 이만큼 잘 살았으면 됐지.”라고 말하였다. 그때 느닷없이 할머니가 “맞아요! 요때 죽으면 젤 좋아요.”라고 말을 하는 통에 그만 빵 터져서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었다.


세상에 죽기 좋은 때가 있으려나. 누구든지 오래도록 머물고 싶음이 본능 아니겠는가. 왕이나 재벌로 산들 “할 만큼 했고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젠 떠나도 된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神과 반가운 조우를 간절히 기다리던 순교자들과 같은 신심이 아닌 다음에야 세상 그 누가 어찌 죽음이 두렵지 않으며 삶이 당당하고 자신 있겠는가?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언제까지나 연습 없는 낯선 인생길을 가야 하기에 좌충우돌하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그 삐거덕거림은 더 심해지며 후회만 쌓으며 살아간다. 그러기에 비단 계절은 겨울이 아니라도 내 마음은 늘 세모의 길목에 서 있는 듯 아쉬움 한가득하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괜찮지 않음에도 괜찮다고 하며 힘을 주는 하느님이 계시고 힘이 없음에도 힘내라 하며 등 떠밀어 주는 성모님이 함께하시기에 견디고 버티며 살아간다. 때로는 내 인생에 만약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나는 어찌 살았을까 하는 아찔함에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말했듯이 내게도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깨어 있는 동안 더 가야 할 길이 있다. 언젠가 그때 세상 떠나기 전 제대로 하지도 못하였겠지만 늦었더라도 “정말 내 마지막 수삼 년 어느 때에는 나름대로 후회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었다.”라는 이 말 한 번 할 수 있으려는지 주님 탄생을 고대하며 대림 제3주일에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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