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어릴 때였다. 추석에 친정 갔다가 부모님과 우리 가족이 바닷가를 걸었다. 연휴를 즐기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걷고 있었다. 그러다 앞쪽이 수선스러워졌다. 거북이가 파도에 밀리며 백사장 가까이서 파닥대고 있었다. 책 크기만 했다. 남자들 두서넛이 거북을 따라가며 잡으려고 파도를 피하면서 손을 뻗어대었다. 나는 가까이서 거북을 본 게 처음이어서 놀라서 보고 있었는데 근처로 거북이 밀려왔다. 무슨 용기였는지 거북 등 껍데기를 양손으로 붙잡아 올렸다.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고 나도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 옆에서 “놔줘라, 놔줘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까지 거북을 잡으려고 허둥대던 사람들이 하는 소리였다.
거북은 놔줬다. 달리 뭘 하겠는가. 아이들과 잠시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나서 남편이 바다를 향해 멀리 던졌다. 내가 거북을 잡지 못했으면 나도 그들처럼 외쳤을까. 아마 누군가 들고 있는 거북을 호기심에 만져보고 싶었을 것 같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등 껍데기를 한번 만져보라고 부추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곤 낄낄거리며 다시 바닷가를 걷지 않았을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들을 때면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이 좋다는 건지 생각하게 된다. 이 말에는 갈등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갈등을 다수의 사람에게 좋게 보이도록 해결하라는 뜻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소수가 가진 갈등은 덮어야 하는 게 아닌가. 갈등의 본질을 들여다볼 생각이 없는 말이다. 명품 백에 명품 옷만 사치가 아닐 것이다. 이런 말치레도 자신을 꾸미는 사치다. 자신이 너그러운 척하느라 정작 억울할 수 있는 당사자는 소소한 걸 따지는 좀스러운 사람이 되고 만다.
전날 아버지를 여읜 성당 교우 문상을 갔을 때다. 함께 간 자매가 울고 있는 자매에게 울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우는 건 돌아가신 분께 아무 도움이 안 된다며 신앙적인 말을 늘어놓았다. 말을 들은 자매는 알고 있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얼른 그만하라는 뜻으로 말하는 자매의 옆구리를 찔렀다. 막 아버지를 잃은 사람에게 무슨 신앙의 대 스승이어서 바보 같은 말을 주절거리는가 싶었다. 묵묵히 그녀의 슬픔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 말고 무얼 할 수 있는 자리인가. 그러는 그녀는 부모님 돌아가실 때 울지도 않았는가. 어불성설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잊은 채 신앙으로 포장한 얄팍한 말을 쏟아내며 하는 자기과시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나로선 전적으로 따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게 가능한가. 내 손가락에 박힌 눈에도 안 보이는 작은 가시가 다른 사람의 어떤 큰 상처보다도 신경 쓰이고 아프게 느껴지는 게 인간 아닌가. 그럼에도 노력해야 한다. 그럴듯한 말은 안으로 꾹 삼키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사랑과 이해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