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3.06.08 10:16

30년 동안 ‘나’를 지켜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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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정홍 안젤로 시인

230611 영혼의뜨락 백그라운드 십자가(홈피용).jpg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윤동주 시인이 쓴 <서시>입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온 겨레가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한 때(1941년 11월 20일)에 쓴 시입니다. 그때 윤동주 시인의 나이는 25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를 쓴 지가 8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쓴 시는 영원히 가슴에 남아, 편리함과 탐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 양심을 흔들어놓습니다. 지구온난화에서 지구 가열화로, 기후변화에서 기후 위기로, 이젠 기후 비상사태란 말까지 들립니다. 하느님이 손수 만드신 창조질서가 무너져 내리는데도, 먹고살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느라 식구들이 모여 시 한 편 읽고 마음 나눌 여유조차 없습니다.


시장에서 30년째 ‘기름집’을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고추와 도토리도 빻아 주고, 떡도 해 주고, 참기름과 들기름도 짜 주는 집인데, 사람들은 그냥 ‘기름집’이라 합니다. 그 친구 가게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달력? 가족사진? 아니면 광고? 궁금하시지요? 빛바랜 벽 한 가운데 시 한 편이 붙어 있습니다. 그 시가 윤동주 <서시>입니다. 시장에서 ‘기름집’을 하는 친구가 시를 좋아한다니? 어울리지 않나요? 아니면? 


어느 날, 손님이 뜸한 시간에 그 친구한테 물었습니다. “저 벽에 붙어 있는 윤동주 ‘서시’ 말이야. 붙여둔 이유가 있는가?” “으음, 이런 말 하기 부끄럽구먼.” “무슨 비밀이라도?” “그런 건 아닐세. 손님 가운데 말이야. 꼭 국산 참깨로 참기름을 짜 달라는 사람이 있어.” “그렇지. 우리 아내도 국산 참기름을 좋아하지.” “국산 참기름을 짤 때, 값이 싼 중국산 참깨를 반쯤 넣어도 손님들은 잘 몰라. 자네도 잘 모를걸.” “…….” “30년째 기름집을 하면서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 욕심이 올라올 때가 있단 말이야. 국산 참기름을 짤 때, 중국산 참깨를 아무도 몰래 반쯤 넣고 싶단 말이지. 그런 마음이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올라올 때마다, 내 손으로 벽에 붙여놓은 윤동주 <서시>를 마음속으로 자꾸 읽게 되더라고.”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구절을 천천히 몇 번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시커먼 욕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아. 그러니까 30년 동안 시가 나를 지켜준 셈이야. 저 시가 없었으면 양심을 속이고 부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하하.”  


그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그 친구가 좋아하는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230611 영혼의뜨락 백그라운드(홈피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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