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3.01.19 11:34

새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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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도경회 스텔라 시인

“붓을 잡으세요, 자 그리고 시작하세요.” 램브란트의 말이다.


우리는 어두운 산길 헤치듯 모든 날을 걷고 걸어 2023년 새해를 맞았다. 한결같은 세월을 우리는 이렇게 365일마다 끊고 다시 시작하면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요즈음은 희망을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유행처럼 남발되는 희망의 메시지가 자칫 공허한 울림으로 들릴까 염려될 만큼 현실이 매우 어렵고 고단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 ‘대룡골 둘레길’이 있다. 새벽에 걷는다. 묵주알 헤며. 추워서 하늘이 팽팽했고 키 큰 전나무들이 우뚝하다. 누리의 첫 새벽, 크고 작은 별들이 눈을 깜박이며 지상의 이방인을 신기한 듯이 바라본다. 어둠을 만나 반짝이는 샛별 달별 나도 바라본다. 내 어리던 날 보던 별자리다. 큰곰자리, 카시오페이아, 케페우스와 북극성을 눈과 가슴에 아련히 담아 본다. 신비롭다. 은하수가 흐르고 유성이 멀리 날아가기도 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혼이겠지. 등에 땀이 난다. 날개 달린 시간의 수레가 다급히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나에게 시간이 무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어둠은 부스러기처럼 사라지고 해뜨기 전 장밋빛 여명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주 짧은 순간 잠깐 볼 수 있다, 선물처럼.


새해 첫날, 사직단에서 북과 꽹과리를 치며 사람들이 해맞이를 한다. 드디어 떠오르는 해! 샘물에 씻은 듯 환하다. 어둠을 씻어주는 장엄한 순간이다. 성호를 긋고 가슴에 손을 모은다.


“나의 주님이시여! 올 한 해가 거룩한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이제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작은 것들을 실천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가령, 어렵고 힘들어도 조금 더 자주 웃기, 내가 맡은 일에 충실하기, 친구에게 먼저 전화하기, 어른들께 조금 더 자주 찾아가기, 한 계절에 신앙 서적 한 권씩은 꼭 읽기, 신약성서 필사 마무리하기 등.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삶을 풍요롭게 가꾸자는 생각을 해 본다. 


그저 순하게 한세상 살면 되는 것을, 봄날처럼 온화하고 순하게 사는 사람은 향기로 남지 않던가. 뭘 그리 장하고 대단한 일을 한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살가운 마음 한 번 제대로 전할 겨를 없이 단호히 앞만 보고 살아온 걸까. 가까운 인연으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새삼스럽게 귀하고 귀하지 않은가. 


우리가 가는 이 길에 희망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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