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3.02.02 11:25

깍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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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현주 스텔라 수필가

휴대폰을 떨어뜨려서 액정이 나가는 바람에 전자 대리점에 들렀다. 저장해 둔 사진과 문서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동안, 장날이기에 돌아보고 오겠다고 했다. 이상고온 현상으로 겨울옷이 팔리지 않는다고 하던 뉴스가 나온 게 어제 같은데 웬걸, 한파가 닥쳐서 시장은 조용했다. 코로나로 힘들고, 한파로 힘든 겨울이다 싶어 빈손으로 둘러보기 죄스러운 지경이었는데 무 몇 개를 앞에 두고 발을 동동거리던 할머니가 보였다. 


“이거 몽땅 5천 원에 가져가요. 오늘 나오는 게 아닌데, 추워서 들어가려고…”


우리식구들은 김치 없이는 한 끼도 먹지 못하는 토종입맛을 가졌지만 배추김치파와 무김치파로 나뉜다. 나는 무김치파, 특히 깍두기를 좋아한다. 방금 담아도 아삭거리는 그 맛이 좋아서 익기도 전에 먹어치운다. 그 할머니 말씀처럼 무는 아삭하고 달았다. 다듬으면서 집어먹고, 양념을 무치면서 간을 본다는 핑계로 또 먹으면서, 깍두기였던 시절이 생각났다. 조직의 힘(?)을 내세우는 그들을 깍두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시절을 일컫는 말이 절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운동과 게임에는 젬병이어서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에서는 첫판에 나가떨어졌다. 고무줄을 머리 위까지 올려도 훌쩍 뛰어 한 번에 감아올려 뛰는 친구들을 보면서 뒤로 슬금슬금 빠지면, 꼭 깍두기라고 하면서 놀이에 끼워주었다. 편을 짤 때 깍두기를 두려면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에서 거의 신공에 가까운 기술을 가져야 이기는데도 늘 함께 놀았다. 어느 편에도 들지 못하는 신세를 깍두기라고도 한다지만, 내가 아는 깍두기는 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함께 어울리는 것이었다. 


지난해, 아이동행 수업을 하면서 학습장애, 품행장애, 분노조절장애 등을 겪는 아이들을 만났다. 또 선택적 함구증을 겪고 있기도 하고, 여러 사정으로 고립된 ‘섬 같은 아이’였다. 학교에서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발표도 하지 않고, 활동도 함께하지 않고, 혼자 섬처럼 따로 있는 아이들이었지만 하나같이 기다리는 것은 친구였다. 듣고 싶은 말을 꾸며 보는 북아트 활동에서 인조인간에게 ‘나랑 친구하자’, 상상 속의 친구에게 ‘같이 게임하자’고 쓴 것을 보았을 때 너무 안타까웠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무엇보다 아이들의 사회성발달과 학습격차를 걱정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등수를 매기고 줄을 세우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줄의 끝에 있거나 줄밖에 있는 아이들과 함께하려는 공감은 잊은 지 오래다. 그런 관계 속에서 길을 잃고 혼자인 것처럼 고립감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던 것은 그저 귀 기울여 들어주며 공감해 주는 것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이가 느꼈던 그리움의 순간들이 이루어져서 위로가 되는 시간이 오길 기도했다. 깍두기를 담그며 함께하는 것을 배웠던 깍두기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지금, 피어나기 위해 흔들리는 어린 꽃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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