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아버지, 저는 철없는 어른입니다.
날마다 영혼의 양식, 정성스레 밥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시는 그 마음 압니다.
알면서도, 세상일에 빠져서 바쁘다는 핑계로 곧장 달려오지 못했습니다.
알면서도, 게으른 습관에 젖어서 곧바로 달려오지 못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곤란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뼈아픈 후회를 하며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고요한 성당, 감실의 불빛은 참 따뜻합니다.
이리저리 부대끼며 피멍 든 마음. 굳게 닫아건 마음을 조금씩 열어봅니다.
어느 결엔가 제 안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은혜로운 손길이 느껴집니다.
여기 이곳에, 그분이 항상 계심입니다. 그분 안에 제가 살아있음입니다.
그분께서 저를 지어내시고 몸의 맨 위에 눈, 코, 귀, 입을 갖춘 얼굴을 둠은,
저로 하여금 하늘 우러러 제 삶의 모습을 돌아보라는 뜻이겠지요?
저로 하여금 사람을 우러러 신뢰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뜻이겠지요?
그분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 새 이름을 갖게 되었을 때를 생각합니다.
테오도라! 그 이름만 불러줘도 천국으로 불림 받은 듯 가슴 설렜지요.
미약한 신앙이나마 받아들이고 교회에 봉사하며, 많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코로나19로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이 보고 싶어 전화를 했습니다.
가까이 있는 듯 반가운 목소리, ‘나중에’ 얼굴 한 번 보자고 했지요.
‘나중에’ 밥 한 번 먹자고 했지요.
더러는 만나 회포를 풀었고 몇은 연락이 없습니다.
얼굴도 못 보고 밥 한 번 먹지 못한, 우리들 사이엔 빈말만 오갔던 걸까요?
그럴 리가요. 연락 없는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투병 중입니다.
‘나중에’란 말, 누군가에겐 이제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헛된 말이 되었구요.
요즘 성당에는 겨울바람과 함께 이상한 소문마저 떠돌고 있습니다.
열 명의 얼굴 중에 일곱 명이 사라지고 세 명이 남는 데 5년도 안 걸린답니다.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친근했던 얼굴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혹시나 하고 이름 불러보지만 낯선 얼굴뿐,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매일 정성을 다해 상을 차려놓고 자녀들을 부르시는 그분의 목소리.
목이 쉬도록 애타게 부르시는 그분의 목소리가 지금은 안 들리는 걸까요?
아숨타, 루치아, 유스티나, 소피아, 라파엘, 마리아, 레오나르도, 릴리아…….
아프지 말고 죽지도 말고, 부디 살아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말고 ‘오늘’ 얼굴 보고, 거룩한 밥 한 끼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