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3.03.03 10:04

사랑의 세레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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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수영 베아트리체 시인

저는 고무나무를 닮은 사람입니다. 윤기나는 잎사귀 앞면과 윤기 없는 잎사귀 뒷면을 동시에 펼쳐 보이는 고무나무는 얼굴에만 로션을 바르고 손에는 로션을 바르지 않은 채 정신없이 살아가는 저를 보는 것 같아요.

 
그런가 하면 저의 남편은 호접란을 닮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가장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자태, 화분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아도 곱게 화장한 앞모습만 보여주는 꽃, 가까이 다가가도 향기조차 남기지 않는 호접란은 언제나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품위 있는 저의 남편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남편은 추운 겨울날 가습기를 사 왔습니다. 우윳빛 몸체에 전원코드를 연결하면 발그스름, 푸르스름하게 무드등 색깔이 변하며 안개처럼 수분이 분사되는 물건이었죠. 늘 코막힘으로 고생하던 남편은 일찍 잠이 들었는데 저는 불면증 때문인지 가습기 때문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불 꺼진 방의 입구엔 앙상한 나무처럼 생긴 스탠드 옷걸이가 서 있었고 거기엔 남편이 다음날 입으려고 걸어둔 롱 패딩 점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둠 속 가습기 불빛과 함께 안개 같은 수분이 검은 점퍼 위로 타고 오르는 모습은 한밤의 공동묘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같아 보였습니다. 그 패딩은 하필 저를 주시하고 있다가 곧 다가올 것만 같은 각도로 서 있었는데 다리도 목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검정 롱 패딩 점퍼의 모습이 영락없는 귀신같아서 저는 이불 속에서 주님의 기도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남편은 코를 골고 있었습니다. 호접란이 한 무더기 핀 것 같은 존재감으로 코를 고는 소리가 처음엔 얄밉다가 어떻게든 자야겠다고 생각하니 옆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덜 무서웠고 코 고는 소리가 웃기기도 했다가 ‘오늘은 많이 피곤했나 보다.’ 싶기도 하더니 나중엔 ‘저 가장은 잠을 자면서도 이곳은 맘 놓고 코를 골만큼 안전한 곳이라고 나를 안심시키는구나.’라는 생각에 잠깐 측은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눈을 감고 있으니 그 소리는 심호흡처럼 편안하고 깊은 리듬감을 가지고 있어서 명상을 할 때처럼 몸에 힘을 빼면 흔들리는 파도 위에 누운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죠.


만약 제가 예민한 사람이었더라면 제가 괴로운 순간에 옆에서 신명나게 코를 고는 배우자의 모습에 서운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귀신에 대한 상상력이 풍부하고 동시에 겁도 많은 저에게 그 소리는 꼭 필요했습니다.


저에게는 그날 밤, 그 소리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같이 행복하자고 시범을 보이는 것처럼 불 꺼진 방, 검정 롱 패딩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사랑의 세레나데였기 때문이죠.

 

230305 영혼의뜨락 백그라운드(홈피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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