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신앙
2023.02.16 11:14

깊은 밤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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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유시연 레아 소설가

…… 어쩌면 길이 보일지도 모르지요.
남양 성모성지 신부의 한마디에 나는 주저 없이 짐을 꾸렸다. 그는 클라라와 프란치스코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그걸 물으면 어쩌나 하고 내심 켕겼는데 다행히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한시름 놓았지만 찜찜했다. 


어머니의 전셋집을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나는 여행을 떠났다. 클라라와 프란치스코를 찾아서 떠난 아시시 클라라 성당에서 수도복을 입은 클라라의 유해를 만났다. 자그마한 키에 매부리코를 한 그녀는 유리관 속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흑갈색 수도복 위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그녀의 앞가슴에는 은색 십자가가 긴 줄 끝에 매달려 있었다. 유복한 가정의 귀족 처녀였던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자선과 수도공동체 생활에 매료되어 그의 삶에 동참함으로써 고행의 길로 접어든다. 많은 세속적인 유혹과 욕망을 절제하고 풍요의 삶을 뒤로한 채 가시밭길을 가는 그녀의 인생은 내 시선에서 볼 때 분명히 고난의 길이다. 동굴과 들판에서 노숙을 하며 탁발을 하는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는 청년들은 안락한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집을 떠난 후 마음이 허해서 수시로 허기가 졌다. 그러면서도 내 작은 셋방에서 늦잠을 자고 일어나 라면을 끓여 먹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안정이 되었다. 


바실리카 대성당 지하에서 나는 프란치스코를 드디어 만난다. 지하 대리석 기둥과 기둥 사이 작은 제단 뒤로 흰 꽃에 둘러싸인 그의 관 둘레를 따라 사람들이 경배하거나 원을 따라 천천히 돌고 있거나 줄을 서서 기다렸다. 나는 그저 멀거니 사람들과 촛불과 차가운 돌벽을 응시할 뿐 아무런 감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벗어난 특별한 관계이건 아니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만 나는 신부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은 동양의 이방인일 뿐이다. 가장 어려울 때 가장 힘들 때 신부가 사준 연극표 스무 장은 내 생을 가로질러가는 기억 중 몇 안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평생 한 가지 따뜻한 기억만으로도 일생을 지탱한다고 하지 않던가. 


죽은 프란치스코를 찾아 산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하 성당을 들어온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돌벽 안에 갇힌 그를 향해 묻는다. 당신이 원한 건 다 이루었습니까. 클라라가 프란치스코를 찾아와 제자가 되고 봉쇄 수녀원에서 일생을 보낸 일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랑은 너무 높고 먼 이야기이다. 


“이 나라는 죽은 사람을 경배하는 문화인가 봐.”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지. 제사를 지내고 묘지를 관리하고, 심지어는 시묘살이라는 풍습도 있었잖아.”

내 물음에 송이 대꾸를 한다. …… 단편소설 「깊은 밤을 지나」 중에서


단편소설 「깊은 밤을 지나」는 소설집 『쓸쓸하고도 찬란한』에 실렸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의 긴 여정에서 터널과도 같은 깊은 밤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삶이 힘겨울 때 신앙인으로서 주로 성지를 찾아가 위안을 얻곤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배경은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성녀가 활동했던 이태리의 소도시 아시시를 찾아갔던 경험을 소설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성지에서 성인의 유해를 만나고 그분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오늘을 사는 자신을 다독이고 힘을 얻곤 합니다.

 

230219 유시연쓸쓸하고도 찬란한(홈피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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