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신앙
2021.11.18 13:53

천주님은 크신 분-최은영의 『밝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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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은정 엘리사벳 교수/경남대

211121 8면 백그라운드(홈피용).jpg

 

최은영의 『밝은 밤』은 “엄마나 할머니, 아주 옛날에 이 땅에 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작가의 오랜 바람에서 나온 작품이다. 백 년의 시간을 관통하여 증조모-할머니-엄마-나의 4대로 이어지는 아픈 이야기이다.


서른두 살 주인공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며,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희령’이라는 동해안 소도시로 떠난다. 희령 천문대의 연구원 채용 공고를 보고 이사를 결심한 것이다. 이사 간 아파트에서 그녀는 우연히도 20년 넘게 만나지 못하던 외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을 계기로 지연은 1930년대 증조할머니 삶에서 시작해 외할머니,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증조모는 위안부로 끌려갈 뻔했고, 할머니는 남편이 중혼인 줄 모르고 결혼했다가 버림받았고, 어머니는 그런 할머니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다.


이 작품은 이처럼 파란만장한 여성들의 가족사 이야기이다. 그 속에서 증조모 삼천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새비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그녀는 백정의 딸로 태어나 멸시받던 증조모를 따뜻한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녀의 남편인 새비 아저씨도 누구보다 따뜻한 심성을 지닌 사람이다. 작품 속의 대부분 남성들이 가부장적이고 무책임한 모습인 데 비해 이런 새비 아저씨의 모습은 참 이채롭다. 꼭 죄로 더러운 사람들 속에 홀로 깨끗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 같다. 그런 새비 아저씨가 가족의 부양을 위해 히로시마에 갔다가 원폭 피해를 당한다.


히로시마의 아비규환의 모습을 목격한 새비 아저씨는 독실하게 믿던 천주님을 원망하면서 죄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둔 천주님께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러면서 자신은 죽을 때 종부성사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남편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이해하는 아내인 새비 아주머니는 그의 뜻에 따라 종부성사 없이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그 심경을 가장 친한 친구인 증조모 삼천에게 편지로 보낸다.   


너 따위 간나가 내 아들 천국 문을 닫아버렸다구. 애 어마이 어깨를 꼭 잡고 소리쳤지. 어마이, 기 말 취소하시라요, 희자 아바이가 천국에 못 간다면 세상 갈 수 있는 사람 어데 있시까. 천주님은 크신 분이라 희자 아바이 뜻을 품어주실 분이라요. 입조심하시라요.  
희자 아바이가 진짜 천주님을 버렸다믄, 화도 안 내고 사람들이 하란 대루 종부성사도 받았을 기야. 천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믄 기냥 미적지근하니 미사 가서 앉아 있다 왔을 기야. 그런 고집부리지도 않았을 기야. 
우리 희자 아바이… 저짝으로 가서 그렇게 미워하고 사랑하는 천주님 얼굴 보갔구나… 그런 생각이 그 어떤 의심도 없이 들었어. 내 고저 이런 생각을 하구 희자 아바이 보내고 있어.


종부성사를 거부한 남편이 다른 사람 생각처럼 결코 천주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종부성사를 받지 않아도 그 신앙의 깊이를 천주님은 다 헤아려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진실은 겉모습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천주님은 크신 분이라 겉치레 형식보다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아신다는 것이다. 남편인 희자 아버지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믿음. 이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고 가장 간결하면서도 가장 본질적인 믿음이다. 이렇게 크신 천주님을 의심 없이 그대로 믿어버리는 마음. 이것이 우리의 초기 신앙의 모습이면서 가장 본질적인 신앙의 모습이 아닐까.

 

211121 8면백그라운-1(홈피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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