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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전사前史 26


고성지역 교우촌 (3)
고성지역 첫 공소는 계동桂洞공소라 했다. 모체는 고성읍 기월리基月里 교우촌이고 큰 규모라고 했다. 두 번째 공소는 종생宗生공소다. 대가면 갈천리葛川里에 있었다.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의 1890년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신자 수 6명, 예비신자 12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 작은 지역을 어떻게 선교사는 방문했을까?


갈천리 옛 이름은 갈내 마을이다. 개천이 갈라지는 곳에 마을이 있었기에 이런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종생공소는 갈내 마을 인근에 흩어져 있던 피난 교우를 누군가가 모으면서 시작되었다. 아마 그 사람이 자기 집을 공소로 제공했을 것이다.


당시 로베르 신부의 거주지는 대구였다. 판공성사를 주려면 먼 길을 떠나야 했다. 동쪽은 경주, 울산까지, 서쪽은 산청, 진주까지 가야 했다. 그야말로 머나먼 고생길이었다. 진주(소촌)지역 공소 방문이 끝나면 다음 코스는 거제도였다.


소촌(문산)에서 거제로 가는 지름길은 고성군 대가면을 지나 통영시 광도면 황리 쪽으로 가는 길이다. 현재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이 라인을 따라 건설되어 있다. 종생공소는 거제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에 로베르 신부의 방문이 가능했던 것이다. 훗날 이 길은 문산(소촌)에 본당이 서자 거제, 통영, 고성 신자들이 본당으로 판공성사 보러 가는 길이 된다.


종생공소 기록은 1894년부터 보이지 않는다. 대신 계동공소 신자 수가 갑자기 불어난다. 종생의 교우들은 기월리에 있던 계동으로 가서 판공성사를 봤기 때문이다. 1890년 부산본당이 신설되자 고성지역은 부산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선교 사제는 부산 쪽에 가까웠던 계동공소로 교우들을 모이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동桂洞공소 기록도 1895년부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장동長洞공소가 등장한다. 고성의 세 번째 공소다. 장동은 기월리와 맞붙은 대평리大坪里에 있었다. 이곳엔 넓은 들이 많았는데 장동 역시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었다. 특히 장동이 있는 들판을 건천乾川들이라 했다. 아마 이전엔 강바닥이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장동은 건천동으로 이름이 바뀐다.


장동공소 기록은 1895년 등장한다. 신자 수 66명이다. 사라진 1894년 계동공소 신자 수는 64명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고성을 방문한 선교사는 1894년까지는 계동에서 교우들을 만났고 1895년부터는 장동 마을에서 판공성사를 주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교우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는 독단적인 공소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대개는 회장 댁이나 비교적 큰 교우 집에서 사제를 모시곤 했다. 고성지역 교우 수가 많아지자 넓은 집이 요구되었는데 마침 장동에 그런 집이 있었을 것이다. 


1899년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 교세통계표엔 장동공소 교우 수가 91명이다. 비교적 넓은 집으로 옮겼지만 장동공소 역시 교우들이 모이기엔 비좁은 장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다음 해엔 계동공소가 다시 부활한다. 타케 신부 1900년 보고서엔 장동 신자 45명, 계동 교우 50명으로 나와 있다. 두 곳을 따로 방문한 것이다. 


계동과 종생공소를 첫 방문한 선교사는 대구본당 로베르 신부였다. 1890년 부산본당이 서자 조죠(Jozean 趙得夏) 신부가 두 번째로 방문했다. 세 번째는 장동공소와 황리공소를 만든 우도(Oudot 吳保祿) 신부가 방문했고 마산포본당이 세워지면서 타케 신부가 네 번째로 방문했다. 타케 신부는 틈실공소 기록을 남겼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27


고성지역 교우촌 (4)
고성지역 첫 본당은 고성읍이 아닌 황리黃里에 먼저 신설된다. 1935년 6월 16일이다. 초대 주임은 명례明禮 출신 신순균(申順均 바오로) 새 신부였다. 같은 날 거제본당도 신설되고 이명우(李明雨 야고보) 신부가 부임했다. 그 역시 갓 서품된 새 신부였다. 신순균 신부는 명례 순교자 신석복(마르코)의 증손자曾孫子다. 부친 신 이냐시오는 신석복 순교자 외아들이었고 신순균 신부는 4형제 중 막내였다. 1949년 38세 젊은 나이로 선종했고 대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황리는 통영군 광도면光道面에 속해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고성지역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원래 황리는 고성군 광삼면光三面에 속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 통영군에 강제 편입되었다. 이때 고성군 도남면道南面도 함께 넘어간다. 광삼과 도남이 합쳐 광도면이 된 것이다.


고성 사람들이 못마땅해 한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당시 황리는 마산에서 통영으로 가는 뱃길의 요지였다. 행정만 바뀌었을 뿐 상권과 인맥은 모두 고성 사람들이 좌우하고 있었다. 황리는 여전히 고성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황리에 본당이 섰지만 실제로는 고성본당으로 여겨졌고 피난 교우들에겐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황리에는 언제부터 피난 교우들이 있었을까? 공식 기록은 우도(Oudot 吳保祿) 신부의 1897년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다. 신자 수 17명, 예비신자 3명이다. 우도 신부는 부산본당 두 번째 신부로 1894년부터 고성지역을 방문했고 장동공소를 만든 분이다. 열정이 있었던 그는 황리 교우촌 소식을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황리에 교우들이 나타난 것은 병인박해와 무진박해(1868년) 이후로 여겨진다. 거제도와 통영 인근 섬에 살던 교우들이 뱃길이 용이한 황리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그들은 육로를 통해 고성, 사천 쪽이나 문산 쪽으로 피신하려 했을 것이다.


이런 연緣으로 훗날 황리공소는 문산과 거제공소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이 된다. 특히 당시는 가능한 교우끼리 혼인하던 시기였다.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권했고 신심 깊은 교우일수록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문산, 고성, 거제, 황리의 구 교우들은 혼인 관계로 서로 얽혀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황리黃里란 지명은 화리花里 즉 꽃마을이란 이름에서 유래한다. 마을을 싸안고 있는 면화산綿花山 때문이다. 해발 414m의 면화산은 계속해서 꽃 피고 꽃 지는 산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어질 면綿 꽃 화花 면화산인 것이다. 당연히 산 아랫마을은 꽃마을(花村)로 통했고 화촌이 화리로 변하면서 황리가 되었다는 해석이다. 


황리에 본당이 섰지만 고성 쪽에도 신부를 보내줄 것을 꾸준히 요구했다. 오래된 계동과 장동공소 회장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황리본당을 고성읍으로 이전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던 중 자동차의 등장으로 황리지역은 갑자기 사양길을 걷게 된다. 뱃길에 의존하던 교통이 육로 중심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이 떠나갔기 때문이다.


황리본당의 고성읍 이전은 1939년 5월 14일 자로 발표된다. 첫 본당 신부는 서정도(徐廷道 벨라도) 신부였다. 황리 주임 고군삼(高君三 베네딕도) 신부는 김천으로 이동되고 황리는 다시 공소가 되었다. 신순균 신부는 부임 후 2년 뒤(1937년) 대구 계산동 보좌로 갔고 제주 출신의 고군삼 신부가 왔던 것이다. 황리본당은 4년 만에 재위 신부 두 분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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