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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은정 엘리사벳 교수/경남대

아파트 공터 버려진 의자에 한 여인이 앉아 있다. 생명이 모두 빠져나간 듯 움직임 하나 없이 그렇게 앉아 있고는 하였다.

 
정찬의 『종이 날개』는 창 너머 이 광경을 보게 된 ‘나’가 여인의 사연을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30대의 행복했던 이 여인은 교통사고로 남편과 어린아이를 잃었다. 아이를 안고 있었으면서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여인은 자신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무의미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그러고는 스스로 폐쇄된 삶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한 여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낯선 그녀가 내민 구원의 손길은 종말론이었다. 그녀의 말로는 한 달 뒤 휴거가 일어나며 이후로 7년의 환난 끝에 예수의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것이었다. 여인은 죄의 덩어리인 자신의 육신이 순식간에 다른 존재로 바뀌고 순백색 세마포에 싸여 빛처럼 빠르게 상승한다는 그녀의 말에서 희망을 느낀다.


그 순간 저는 오열의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 끔찍한 곳에서 벗어나 순백색 세마포에 싸여 상승하고, 나의 고통에 태연했던 세상은 마친 그 고통을 당하는구나.


물론 종말론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홍보용 책자를 읽어본 ‘나’의 말처럼 선택받은 이는 천국에 가고 그렇지 못한 자는 지옥으로 간다는 그들의 주장은 인간을 분리시킬 뿐이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예수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골짜기에 다리를 놓지 않았던가. 그런데 종말론은 여인의 독백처럼 자신은 구원받고 상대방은 파멸하는 증오의 믿음인 것이다.


이 그릇되고 허무맹랑한 종말론에 왜 여인은 기댈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세상이 그녀의 고통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오직 종말론의 낯선 여인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는 그 손을 잡았던 것이다. 


빛이 깡그리 사라져버린 세상 속에서 눈에 보이는 유일한 빛이 논리와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해서 그 빛을 외면할 이가 얼마나 될까요? 제가 겪었던 불행이 이성과 논리로 설명되어지나요?


약속한 날에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에서 모여든 8천 신도는 다시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들 대부분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에게 세상이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면 그들은 다시 세상을 사랑할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버림받고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종이 날개』는 이 단순한 사실을 말하는 작품이다.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기도는 끝났고, 불빛은 꺼져버렸다구요. 정말 꺼져버렸을까요? 불빛이 꺼졌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요? 운명에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 잔혹한 상처에 할퀴고 할퀴어 두 발로 땅 위에 설 수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요? 누군가가 날개를 달아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종이로 만든 날개라도….


지식인인 ‘나’는 그녀의 아픔을 창 너머로 엿보기만 했지만 종말론의 한 여인은 종이로 만든 허약한 것이나마 그녀에게 구원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우리 삶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런 사랑의 실천이다. 세상은 당신의 그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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